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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트럼프 이은 ‘전복의 바람’ 유럽본토 덮치나

중앙선데이 2016.12.04 01:08 508호 11면 지면보기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Brexit)가 현실이 될 걸로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공직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부동산 재벌 총수 출신인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될 걸로 예상한 사람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현실이 됐다. 세계화의 흐름에서 낙오하고, 그 혜택에서 소외된 침묵하는 다수의 ‘루저(loser)’들이 표를 통해 주류 엘리트 중심의 기성 질서를 뒤엎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영국에서 시작해 미국으로 번진 ‘전복(顚覆)의 바람’은 이제 어디로 향할 것인가. 내년 4월 프랑스 대통령 선거가 주목되는 까닭이다. 앵글로색슨 진영을 대표하는 영국과 미국에 이어 유럽 대륙의 중심국인 프랑스까지 자국 우선주의와 반(反)세계화 바람에 무너진다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반한 서구 질서는 일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변은 계속될 것인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는 프랑스 대선 정국을 짚어봤다.


내년 4월 프랑스 대선, 보수 피용 vs 극우 르펜

 



바닥 민심을 못 읽는 여론조사가 이변의 시작이라면 프랑스에서도 그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27일 중도우파 정당인 공화당의 대선후보 경선 결선투표에서 프랑수아 피용 전 총리가 66.5%를 얻어 33.5%에 그친 알랭 쥐페 전 총리를 누르고 후보로 확정됐다. 경선에 나선 피용과 쥐페, 그리고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을 놓고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피용은 2위에 10%포인트 이상 뒤지는 3위를 면치 못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영 딴판이었다. 피용은 1차 투표에서 확실한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결선에서도 압승을 거뒀다. 브렉시트와 미 대선에서 나타난 여론조사와 표심의 괴리 현상이 똑같이 반복된 셈이다.



공화당의 사르코지 5년, 중도좌파 정당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5년 동안 프랑스는 날개 없는 추락을 계속했다. 피용의 부상은 실패한 지도자들의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반작용일 가능성이 크다. 지난 10년간 프랑스에서 개혁은 말과 글로만 존재할 뿐 대부분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나고 말았다. 평균 실업률은 10%, 청년 실업률은 26%까지 치솟았다. 재정적자가 쌓이면서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90%에 육박하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무슬림 난민까지 몰려들고 있다.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이슬람계 주민과의 갈등이 심각한 사회 불안 요인이 된 지는 오래다. 그럼에도 사르코지나 올랑드는 지도자다운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얼음 아래 불을 감춘’ 피용 공화당 후보]

피용은 사르코지 밑에서 5년간 총리를 지냈다. 프랑스 헌법상 총리는 내치를 통할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이원집정제적 대통령중심제를 택하고 있는 프랑스에서 총리는 대통령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다. 사르코지의 보좌관들은 피용을 철저히 견제했다. 총리가 국회에서 발표할 정책을 미리 언론에 흘려 뒤통수를 치기도 했고, 뒤돌아 흉을 보기도 했다. ‘미스터 노바디(Mr. Nobody)’로 불리는 수모를 참아가며 피용은 묵묵히 5년을 견뎠다.



올랑드 정부 출범과 함께 총리직에서 물러난 피용은 3년 동안 홀로 프랑스 전국을 돌며 대권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정치·경제·사회·노동·교육·외교·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수천 쪽에 달하는 꼼꼼한 개혁 로드맵을 작성했다. 그는 이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대통령에 당선되면 즉시 그대로 실천하겠다고 공약했다. 당선을 개혁에 대한 공식인증으로 보고, 말로만 하는 개혁이 아니라 실천하는 개혁의 모범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프랑스 북서부 사르트에서 의원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 27세에 최연소 의원이 된 피용은 지난 30여 년간 교육·노동·사회·기술·환경 등 5개 부처 장관을 역임했다.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과묵한 성격이어서 ‘얼음 아래 불을 감춘 인물’로 평가하는 지인들도 있다.



피용에 따르면 프랑스는 파산 상태다.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제대로 된 개혁을 하지 않으면 조만간 2류 국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고통스럽지만 뼈를 깎는 개혁을 통해 나라 살림을 바로잡고, 법과 질서를 통해 국가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프랑스적 가치와 정체성을 회복해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고, 유럽 최고 국가의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미국’을 외치는 트럼프와 통하는 지점이다.



 

[드골의 얼굴 가진 대처리즘 지향]

그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 사회적으로는 보수주의, 정치적으로는 드골주의(De Gaullism)를 신봉한다.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가 밀어붙인 과감한 경제 개혁이 필요하다며 공공부문 인력 50만 명 감축, 주당 근로시간을 35시간에서 39시간으로 연장, 향후 5년간 정부지출 1000억 유로(약 125조원) 삭감 등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피용은 낙태와 동성애에 부정적이다. 프랑스는 다문화 국가가 아니라며 프랑스적 전통과 정체성을 강조한다. 외국인도 프랑스에 와서 살면 프랑스적 가치와 문화에 동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 이민자에 대한 통제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를 제외하면 극우파 정당인 국민전선(FN)의 주장과 일정 부분 겹친다. 피용의 급부상에 FN이 당황하고 있다.



1958년 출범한 프랑스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샤를 드골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다. 드골은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국가이념으로 삼아 미국이나 소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사회적으로는 프랑스적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주의, 경제적으로는 국가 주도주의를 채택했다. 이를 통칭한 개념이 드골주의다. 드골주의의 깃발 아래 프랑스는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며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했다.



하지만 68년 5월 사태를 거치며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탈(脫)권위와 세속주의를 앞세운 이른바 ‘68세대’는 권위주의와 국가주의·애국주의를 배격하고 전통과 규율·통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신(新)질서를 추구했다. 하지만 피용은 68세대가 남긴 부(負)의 유산이 프랑스 사회의 퇴행과 침체의 원인이 됐다고 지적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프랑스가 잘나가던 드골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피용의 주장은 도시와 지방의 중산층 이상 유권자들 사이에 특히 뜨거운 공감을 얻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자유시장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드골과는 차이를 보인다. 스스로 ‘신(新)드골주의자’를 자처하는 까닭이다. ‘드골의 얼굴을 가진 대처리즘’이 그의 지향점이다.



 

[르펜, 난민막고 EU 탈퇴 투표 공약]

지난달 27일 해리스 인터랙티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피용은 내년 4월 대선 1차 투표에서 26%를 얻어 FN 대표인 마린 르펜(24%)과 함께 결선에 진출, 5월 결선에서 67%의 득표율로 르펜(33%)을 가볍게 누를 것으로 예상됐다. 현재 여론조사로 보면 피용이 차기 대통령에 성큼 다가선 셈이다.



프랑스에서 모든 선거는 결선투표제로 치러진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면 그걸로 끝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상위 1, 2위만 진출하는 결선투표에서 최종 승자가 가려진다. 후보들이 난립한 1차 투표에서는 이념이나 소속 정당을 보고 찍지만 2차 투표에서는 특정 후보를 당선시키거나 낙선시키기 위해 전략 투표를 하기도 한다. 그 결과 1차 투표에서 1위를 하고도 결선투표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FN의 전 대표였던 장마리 르펜은 2002년 대선 1차 투표에서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을 꺾고 결선에 진출했지만 좌파 지지자들이 똘똘 뭉쳐 우파의 자크 시라크를 밀어주는 바람에 고배를 마셨다. 선출직의 대표성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이긴 하지만 좌우의 양대 주류 정당이 군소정당의 진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장애물이란 비판도 있다. 내년 대선에서도 똑같은 양상이 벌어져 결국 피용이 당선된다는 게 현재 여론조사의 예측이다. 하지만 장담하긴 이르다.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처럼 이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1일 올랑드 대통령이 불출마를 선언함에 따라 내년 프랑스 대선은 공화당의 피용과 FN의 르펜, 그리고 사회당의 마뉘엘 발스 총리의 3파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올랑드의 출마 포기로 발스는 내년 1월 실시될 사회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다. 하지만 4%라는 올랑드의 굴욕적 지지율이 말해주 듯 사회당 정부에 대한 실망감과 반감이 워낙 크기 때문에 누가 후보가 되더라도 사회당의 정권 재창출은 어려워 보인다.



이변을 노리는 르펜은 트럼프 바람에 기대를 걸고 있다.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두 축으로 한 미국 우선주의로 트럼프가 승리를 거뒀듯이 자신도 프랑스 우선주의로 이변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르펜은 이민자와 난민의 유입을 막고, 영국처럼 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르펜의 승패는 2차 결선투표에서 전통적인 좌파 지지층의 표를 얼마나 끌어오느냐에 달려 있다. 르펜이 연금 개시 연령 인하, 사회안전망 확충, 공공복지 확대 등 서민과 근로자 계층을 겨냥한 포퓰리즘적 공약을 내놓으며 좌클릭 행진을 가속화하는 이유다.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는 저소득층의 표심을 노린 전략이다. 국민에게 희생과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피용과는 정반대다. 과연 그들은 2차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콤한 복지를 약속한 르펜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 아니면 예상되는 고통을 각오하고 피용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 프랑스판 트럼프 현상은 노동자·서민 계층의 선택에 달렸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bae.myungb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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