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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의 여인’이 선택한 검정 바지슈트의 의미

중앙선데이 2016.12.04 00:22 508호 29면 지면보기
‘모두를 실망시킨 노출 없는 패션’.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이 절망적인 표현은 지난달 25일 서울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진행된 제37회 청룡영화상 취재 보도 중 한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의 검색 키워드는 ‘김혜수’였다.


김혜수의 개념 패션

이날 영화제 사회를 맡은 김혜수의 옷차림은 ‘바지슈트’였다. 공동 사회를 맡은 배우 유준상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레드카펫에 등장한 김혜수는 앞 여밈선에 프릴이 달린 흰 블라우스에 검정 턱시도 재킷 그리고 밑단이 나팔모양으로 퍼지는 검정 판탈롱 팬츠를 입었다. 손에는 원통 모양의 검정색 클러치 백 하나. 23년간 청룡영화제의 사회를 맡으며 레드카펫 드레스의 정점을 찍었던 김혜수에 거는 관객의 기대는 확실히 빗나갔다.



그동안 김혜수의 청룡영화제 드레스는 해마다 호명되는 여주인공이나 남주인공 수상자보다 화제가 될 만큼 파격적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관음증의 대상으로, 누군가에게는 자신감 넘치는 개성으로, 이번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하는 기대감으로. ‘청룡의 여인’ ‘청룡의 안방마님’으로 불렸던 김혜수의 거침없고 당당한 드레스 스타일은 청룡영화제의 최대 이벤트이자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한데 이번엔 누구나 다 기대하던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중요한 결단을 내리기 위해 비즈니스 모임에 참석하는 CEO처럼, 문상을 가는 진지한 조문객처럼, 그의 옷차림은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지는 바지슈트차림이었다. 물론 이날도 언론과 관객의 김혜수 스타일에 대한 주목도는 여전히 높았다. ‘김혜수라서 가능! 시상식 공식 깬 파격 슈트 패션’ ‘모두의 예상을 깬 그녀’ ‘남자도 따라올 수 없는 수트의 품격’ ‘우아한 나팔바지 패션’이라는 제목들이 그의 꼿꼿하고 우아한 워킹 사진과 함께 인터넷을 달궜다.



이때 눈에 띈 제목이 바로 앞서 지적한 ‘모두를 실망시킨 노출 없는 패션’이다. 자, 이제부터 다시 얘기 해보자. 늘 기대하던 파격적인 드레스 차림은 아니었지만 관객들은 김혜수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소신 있는 개념 패션에 박수를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평소에도 영화인의 창작의 자유와 시국 사안에 소신 있는 발언과 행동을 해온 그다. 이날의 바지슈트 스타일링도 그만의 영리하고 사려 깊은 선택으로 보인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영화인의 축제이니 기꺼이 참석해 함께 축하하고 기쁨도 나눠야한다. 한편으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우울한 시국, 추운 겨울 거리에서 촛불집회를 하는 국민들의 바람도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현장을 인터넷이든 방송이든 어디선가 보고 있을 사람들에게 우울하고 부끄럽고 절망적인 지금을 잊지 말자고, 나도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다고 무언의 힘을 보태고 싶었을 것이다.



짧은 헤어스타일을 포마드로 가볍게 빗어 넘기고, 화장기 없는 투명한 얼굴로 나타난 김혜수. 자신의 생각대로, 소신대로 개념 스타일링을 선보인 그는 이번 2016 청룡영화제에서도 여전히 빛나고 멋있었다.



※개인적으로 드는 질문 한 가지. 김혜수의 슈트 패션을 두고 신인배우의 드레스 차림과 비교하며 ‘볼륨감 대결 압도적인 승? 아찔’이라고, ‘시선 사로잡은 푹 파인 의상에도 자신만만’이라고 제목을 붙인 그들에게 묻고 싶다. 꼭 그래야만 했나요?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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