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로워진 일상

중앙선데이 2016.12.04 00:10 508호 34면 지면보기
일상



국어 사전 [명사] 日常.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영어로는 ‘daily life’로 번역되지만 ‘지루하고 판에 박힌’이라는 의미로는 ‘routine’으로 번역된다.


이윤정의 공감 대백과 사전

그 여자의 사전 많은 시간의 수면과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의 빈둥거림과 어슬렁거림으로 채워지던 주말의 나른함.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린 주말의 평온함. 그러나 그것의 진정한 소중함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마음먹게 된 것.



 



주말 아침. 아무리 기다려도 눈을 뜨지 않는 주인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고양이가 침대 위로 올라와 얼굴을 비벼댄다. 평범한 주말 여자의 일상은 이렇게 시작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서도 고양이 못지 않게 하루종일 어슬렁거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그 평온함과 나른함.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여자의 주말 일상은 그 모습을 바꿨다. 서둘러 집안을 간단히 정리하고 옷과 몇 가지 도구들을 챙겨 집 밖으로 나선다.



산길로 접어든다. 일상적인 주말에 집안에서 빈둥거리다 지치면 느긋하게 산책에 나서던 그 길이다. 산책의 본질은 목적지와 의도가 없다는데 있다. 산책의 참맛은 하나도 급할 것 없이 터벅거리는 발걸음에 있다.



그러나 같은 길이지만 오늘은 그런 산책이 아니다. 늘 다니던 버스 길이 통제로 가로막혀 할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하는 길이다. 목적지도 뚜렷하다. 시내의 광장으로. 벌써부터 산 아래쪽에선 마이크를 통해서 나오는 높은 목소리,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열기가 느껴진다. 왠지 초조해져 바쁘게 걸음을 내딛는다. 그곳에 가면 인도 위로만 고개 숙이고 서로 모른 척하며 걷던 사람들이 도로 위를 소리치며 서로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걸을 것이다. 벌써 몇 주째다.



걷다 보면 무슨 생각이든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주말마다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아무 스케줄도 없이 지내는 일상을 살다가 주말마다 가야할 곳과 해야할 일이 생겨버린 여자의 삶은 과연 ‘주말이 있는 삶’이 된 것일까 ‘주말이 없는 삶’이 되어버린 것일까.



헷갈림은 숨어있던 불평을 일깨운다. 일상이 살아있던 나날로 돌아가고 싶어. 가야할 곳도 외쳐야 할 것도 없는 일상으로, 촛불은 거리에서 군중과 함께가 아니라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혼자라는 느낌을 즐기고 싶을 때 켜고, 뉴스를 매일 매 시각 챙겨보지 않아도 세상이 걱정 없이 돌아가던 그 때로. 소소한 감정과 웃을 거리를 찾아서 칼럼을 쓸 수 있었던 그 때로.



하지만 한발 더 걸으면서 또다시 생각은 바뀐다. 이건 일상의 퇴보가 아니라 일상의 진보일지도 몰라. 느긋함 대신 긴장이 빼곡히 들어선 지금의 비일상적인 일상들 속에서 우리는 그것의 거대한 이면을 바라볼 수 있었으니.



평범한 일상이 삐걱이지 않고 돌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톱니 바퀴처럼 맞물려야 한다는 것을, 그 톱니 바퀴의 날 하나하나가 내 일상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을, 톱니바퀴의 중심이 고장 날 때까지 애써 외면하고 살았던 세상의 구석구석들을 보게 됐으니. 생각해보면 세상의 어떤 사람들의 일상은 늘 초조함과 불안함, 그리고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그리워하는 절망으로 채워져 있을 테니.



여자는 또 걷는다. 한밤중에도 도로는 막혀있을 것이며 다시 산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일상적인 주말이라면 5000보도 걷지 않았던 여자는 오늘은 대략 2만보 이상을 걷게 될 것이다. 어두운 산길은 외롭고 무서울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투덜대지 않기로 한다. 나른하고 평온했던 일상을 되찾기 위해, 이 길을 다시 아무런 의도 없는 산책길로 돌려놓기 위해 나는 잠시 몇 주 동안 판에 박힌 일상들을 벗어나는 것뿐이다. 그 안온한 일상의 톱니바퀴 뒤에 또 무슨 음험한 비밀이 피어나지 않을까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 편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잠시 나의 일상을 바꾸었을 뿐이다. 초조해 하지 않고 새롭게 생긴 일상을 받아들이기로 하며 또 걷는다. ●



 



 



이윤정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