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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21세기 한반도의 지정학

중앙일보 2016.12.03 01:00 종합 27면 지면보기
복거일 소설가

복거일
소설가

큰 나라들에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남북으로 나뉜 터라, 우리에게 지정학적 조건은 중요하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를 줄곧 위협해왔다. 우리는 미국과 일본의 도움으로 그 거대한 공산주의 세력을 힘겹게 막아냈다. 미국에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미 동맹에 대한 걱정이 나온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한반도에 관심이 작았다. 19세기 말엽 잠시 ‘은자의 왕국’에 호기심을 가졌었지만 빈곤하고 부존자원도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조선을 잊었다. 주변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조선을 차지하려 다툰 것과 대조적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고립주의에 기울고 영토적 야심이 적었던 강대국이다. 태평양 건너편 동북아시아로 진출하려는 뜻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한반도를 해두보(beachhead)로 여기지 않았다. 해두보는 대륙으로 진출하려 할 때야 뜻을 지닌다. 미국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놓친 근본적 이유가 거기 있다.

이런 태도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뒤 남한을 떠맡은 뒤에도 이어졌다. 1947년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한국의 군사적 가치를 아주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냈고, 이듬해 애치슨은 한국과 대만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49년 미군은 소수 군사고문관들만 남기고 철수했다. 심지어 한국전쟁 중에도 전황이 불리해지면 일본으로 철수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은 일본만 우방으로 삼으면 서태평양을 지킬 수 있다고 여겨왔다. 지금도 그렇다.

노무현 정권이 북한에 유화 정책을 펴면서 미국은 한·미 동맹을 실질적으로 폐기했다. 한국에 제공한 기밀들이 곧바로 북한에 흘러가는 것을 알자, 한국에 기밀들을 제공하기를 멈췄다. 마침내 라이스 국무장관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혈맹’ 한국을 베트남전쟁의 적국 베트남보다 한 단계 아래 우방으로 규정했다. 이제 미국은 한국이 중국의 영향권으로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 전략적 투자를 꺼린다.
일본은 다르다. 13세기 원(元)의 침공 이후 일본은 조선이 자신에 대한 침공 기지로 이용되는 것을 걱정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해두보로 삼아 대륙으로 진출하려 시도했다. 2차 대전 뒤엔 한국이 공산주의 세력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잘 인식한다.

근년에 러시아에 푸틴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 중국, 러시아의 공산주의 연합이 복원되었다. 이 세력에 미국, 한국, 일본의 자유주의 연합이 대응한다. 이 연합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일본이다.

일본은 국력과 군사력이 아울러 크다. 정보 수집에도 뛰어나 북한의 기습 공격에 대응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전시에 필요한 물자도 대부분 일본에서 공급받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일본이 미군의 후방 기지가 된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은 이 사실을 괴롭도록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일본에서 점령 임무를 수행하던 미군이 없었다면 한국전쟁 초기에 한국이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일본을 후방 기지로 삼을 수 없었다면, 초기의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어려웠을 터이고 중공군을 한반도 중부에서 저지할 수 없었을 터이다. 비행장들과 모항들은 대부분 일본에 있었고 지친 육군 부대들은 일본에서 재편성되었다. 군수품들은 거의 다 일본이 제공했으니 한국전쟁으로 일본의 경제가 부활했다는 얘기에 이런 사정이 담겼다.

지정학적 조건이 그러하므로, 미국은 한국에 일본과 협력하라고 권고하고 때로는 강요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불행한 역사는 그런 협력을 어렵게 했다. 큰 권력과 지도력을 지녔던 박정희 대통령만이 정권의 명운을 걸고서 일본과 수교할 수 있었다. 우리의 안보와 발전에 결정적 요소지만 다른 대통령들은 결코 이루지 못했으리라는 점에서, 일본과의 수교는 박정희 대통령의 위업들 가운데서도 으뜸이다.

미국 지도층은 유럽의 후손들이어서 미국은 늘 유럽으로 끌린다.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한 뒤에도 미국은 ‘독일 먼저’ 격파한다는 전략을 바꾸지 않았다. 미국이 동아시아에 보다 큰 비중을 두도록 하는 일은 우리에겐 생존이 걸린 과제다. 이 일에서 능력이 작은 우리는 능력이 큰 일본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이번에 체결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뜻이 크다. 원래 이명박 정권이 추진했다 막판에 포기했을 만큼 어려운 과제였다. 옥석구분(玉石俱焚)의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큰 업적이 폄하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야당들의 온갖 비방을 견디며 일을 매듭지은 국방부의 꿋꿋한 모습은 뜻있는 시민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복 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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