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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 정치 일정부터 합의하라

중앙일보 2016.11.29 18:50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진국 대기자

김진국 대기자

“하야(下野)가 탄핵과 다를 게 뭡니까.” 대학원생 아들이 따졌다. “검찰 수사도 받겠다고 했다가 안 받는데 하야한다는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야하더라도 탄핵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의원면직보다 파면해야 한다는 논리다.

‘임기 단축’ 얘기도 감동 없어
탄핵 세력 약화 노림수 때문
대통령이 던진 프레임 벗고
조건 없는 사퇴 시한 정해야
과거보다 중요한 건 미래
탄핵과 개헌 논의 병행 가능

 아들은 국민의 입장에서 묻는데 나는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었다. 27일 원로들의 하야 촉구 성명에 이어 28일 새누리당 친박근혜계 의원들까지 하야를 건의했다. 29일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제3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핵심은 “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임기 단축’을 이야기했는데도 감동이 없다. 우선 너무나 많은 정치공학적 셈법들을 감추고 있어서다. 계산이 복잡하다는 건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말이다. 박 대통령은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말했지만 아직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았다. 타이밍도 놓쳤다. 좀 더 일찍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이 정도 이야기로도 공감을 얻었을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주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법 절차’에 따라 물러나는 방법은 탄핵과 개헌밖에 없다. 탄핵을 앞둔 이 시점에 국회에 결정을 맡기겠다는 건 표현만 없을 뿐 개헌을 하자는 말이다.

 필자도 개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이후 역대 대통령이 하나같이 임기 말에 측근 비리로 곤욕을 치렀다. 지지율이 4~5%라도 사퇴시키는 것이 어렵다. 책임을 지지 않는 대통령제다. 그러나 정치개혁은 자기 것을 버릴 때 가능하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면 정작 좋은 뜻이라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 개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마저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이다. 정말 개헌을 할 생각이라면 구차한 조건을 달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국회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정말 어렵다. 거국내각 총리를 제안했을 때 합의도 못하고 시간만 끄는 것을 불과 며칠 전에 봤다. 국회가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탄핵 찬성과 반대로 갈라졌던 전선이 개헌파와 호헌파로 재편된다. 개헌파는 또 대통령제와 내각제로 갈라져 옥신각신할 가능성이 크다. 박 대통령은 그런 약점을 노렸을 가능성이 크다.

 야당은 당장 대통령의 제안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탄핵 전선은 크게 흔들린다. 여론의 눈치를 보며 탄핵 대열에 끼었던 일부 새누리당 의원은 이참에 슬그머니 발을 뺄 태세다. 개헌에 의욕을 보이는 일부 의원도 탄핵을 미루자고 나설 수밖에 없다. 탄핵안을 발의해도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 불투명해졌다.

 국회만 지난다고 끝이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탄핵안을 접수한 뒤 180일 안에 결정하게 돼 있다. 하지만 훈시조항이다. 최순실씨 재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내년 초 박한철 소장과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가 끝나면 겨우 심리정족수인 7명만 남는다. 한 명만 더 사퇴해도 탄핵 심판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박 대통령의 담화는 절묘한 제안이다. 국민적 분노 앞에서 정치공학적 계산을 하고 있다는 건 참담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사퇴를 미루면 무얼 할 건가. 정치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법보다 민심이다. 조건 없이 던질 때 기회가 생긴다. 민심은 조변석개(朝變夕改)한다. 그렇다 해도 반등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정치는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미래를 설계하는 게 더 중요하다. 광장의 목소리를 제도권으로 수렴해 내는 게 정치의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하야 이후를 만들어가는 것은 정치권이 할 일이다.

 대통령이 던져 놓은 프레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굳이 ‘법 절차에 따른 퇴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대행체제를 요구할 수 있다. 정치권이 합의해 조건 없는 사퇴 시한을 정할 수도 있다. 정치 일정부터 합의하면 된다. 그 일정대로 다른 논의를 이어갈 수도 있다.

 그런 조건이라면 개헌 문제도 다룰 수 있다. 이미 국회 차원에서 상당한 토론이 이뤄진 상태라 개헌도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1987년 6월 항쟁 때도 6·29 선언을 한 지 4개월 만에 여야 합의를 통해 개헌안을 공포하고, 2개월 만에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어려우면 덮어두고 시간표대로 가면 된다.

 국정 공백을 최소화해야 한다. 수사와 병행하려면 대행체제로 가는 수밖에 없다. 합의된 정치 일정에 맞지 않으면 그냥 가야 한다. 다만 공정 선거는 보장해야 한다. 대통령이 당장 사퇴하라는 게 국민 여론이다. 하지만 사퇴하면 60일 이내에 선거를 치러야 한다. 대부분 준비되지 않았다. 과거 정리보다 더 중요한 건 미래다.

김진국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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