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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걷기왕' 박주희. 영화에선 악바리 경보선수, 현실에선 느긋하고 소박한 게 좋아요

중앙일보 2016.11.29 17:04
“너무 힘들면 그만해도 돼.” 누군가에겐 따뜻한 위로의 말이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걷기왕’(10월 20일 개봉, 백승화 감독)에서, 딱히 꿈이랄 것이 없었던 여고생 만복(심은경)에게 “뭐든 죽기 살기로 임하라”고 가르치는 육상부 선배 수지(박주희)에게는 특히 그렇다. 늘 경기장 트랙만 보고 앞으로 달려 온 그는, 만복의 변화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신도 모르게 함께 성장해 간다. 수지 역을 맡아 ‘걷기왕’을 안정감 있게 뒷받침한 박주희(29)를 만났다. 아직 모두에게 친숙한 얼굴은 아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독립영화계로부터 사랑받은 배우다. ‘여행’(2009, 배창호 감독)으로 데뷔해, 여린 몸에서 발산되는 강렬한 에너지와 변화무쌍한 마스크로 ‘거인’(2014, 김태용 감독) ‘치욕일기’(2015, 이은정 감독) 등 수많은 독립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온 박주희. ‘걷기왕’에서는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자르고 한층 힘을 뺀 자연스런 연기로, 만복 역의 심은경과 극을 차분하게 보조한다. 첫 장편영화 주연작 ‘마녀’(2014, 유영선 감독) 인터뷰로 2년 전 magazine M과 만났던 박주희는, 그때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이었다.
사진=정경애(STUDIO 706)

사진=정경애(STUDIO 706)

‘걷기왕’에 출연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4년 전 TV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2012, MBC every1)에 출연했을 때, 촬영장에서 메이킹 영상을 담당하는 백승화 감독님을 알게 됐어요. 당시 노랗고 짧은 헤어스타일의 반항적인 여배우 역을 연기했는데, 그 모습에서 수지를 떠올린 백 감독님이 올해 1월쯤 ‘걷기왕’ 출연을 제안하셨죠.”
‘걷기왕’은 좀 독특한 메시지를 담은 한국영화인데요.
“시나리오를 보며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2005, 미키 사토시 감독) ‘주노’(2007,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 같은 작품이 떠올랐어요. ‘모든 걸 다 열심히 할 필요는 없어’라는, 한국영화에선 흔히 찾아보기 힘든 주제를 다룬다는 게 신선했죠. 일단 오랜만에 고등학생 캐릭터를 연기하게 돼 반가웠고요(웃음). 사소한 배역 하나 허투루 쓰이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처음으로 전문 경보 선수 역을 연기했어요.
“경보는 겉보기엔 쉬운 듯하지만, 막상 해 보면 달리기보다 열 배 정도 힘든 운동이에요. 극 중 수지처럼 유소년 경보 선수로 활동하다 부상을 입고 운동을 그만둔 김희수 코치님께 촬영 한 달 전부터 경보를 배웠죠. 전신에 단단히 힘주고 걸어야 하는데, 처음엔 5분도 걷지 못하겠더라고요. 무엇보다 혼자 하는 스포츠라 무척 외로워요. 올해 출연한 단편영화 ‘팡뜨’(양진열 감독)에서는 펜싱 선수를 연기했는데, 배우로서 새로운 운동을 배울 때마다 운동선수들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생겨요.”
촉망받는 마라톤 선수였던 수지는 불의의 사고로 더 이상 달리지 못하지만, 그 대신 경보 선수로서 성공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죠. 실제 본인과 얼마나 닮았나요.
“평상시의 털털한 모습은 닮았지만, 저는 수지처럼 한 가지 꿈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편은 아니에요. 오히려 만복 역의 (심)은경이 수지 같은 열성적인 노력파에 가깝고, 저는 만복과 더 닮았어요. 늘 스스로 뭘 해야 될지 모르겠고, ‘언젠가 하고 싶은 게 생기겠지’ 생각하곤 했거든요. 최근 들어 꼭 이루고픈 꿈이 생겼는데, 수지를 연기하며 동기 부여가 됐어요.”
어떤 꿈인가요.
“최근 종영한 TV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tvN)를 보면서, 왠지 제가 ‘극 중 충남 이모(윤여정)처럼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따뜻한 남쪽 지방의 넓은 집을 사서, 결혼 안 한 친구들과 함께 개나 고양이를 키우며 즐겁고 소박하게 노년을 보내고 싶다’는 꿈이 생긴 거죠. 그러기 위해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모아야겠죠(웃음)?”
심은경과의 호흡은 어땠어요.
“둘 다 낯을 많이 가리는 타입이라, 촬영 초반에는 친해지기 어려웠어요.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말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을 정도였죠. 나이 많은 제가 먼저 다가가면서 친해졌어요. 마치 ‘걷기왕’에서 만복과 수지가 가까워지는 과정처럼 말이죠. (심)은경이 연기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재능이 넘치더라고요. 게다가 정말 무서울 정도로 열심히 하죠. 어린 나이에 주연급 배우로 주목받는 친구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연기에 임한다는 게 놀라워 보였죠(웃음).”
사진=정경애(STUDIO 706)
 
‘걷기왕’의 메시지가 배우 박주희에겐 어떻게 다가왔는지 궁금해요.
“‘조금 더 느긋하게, 길게 내다보고 가자’고 생각하게 하죠. 세상에는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도 있고, 좋은 영화들도 이미 많이 나왔는데, ‘그럼 나는 지금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고민할 때가 많아요.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해요. ‘내가 굳이 미친 듯이 노력해 어떤 성취를 이뤄야 하는 건가(웃음)’. 꼭 무언가를 추구해야 좋은 삶인 걸까요?”
처음 연기를 시작하며 상상했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나요.
“제가 상상하던 것보다 속도가 많이 느려요. 20대 중반이 되면 제 자신이 굉장히 멋있어질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대학교(건국대학교 영화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일찌감치 포기했어요. ‘난 계속 학생 티를 벗기 힘들겠구나’ 하고(웃음).”
영화마다 다른 얼굴처럼 보일 정도로 다양한 연기를 시도하고 있잖아요.
“어떤 ‘주기’가 있는 것 같아요. ‘마녀’ 이후에는 한동안 어둡고 냉소적인 역할만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러다 ‘걷기왕’으로 헤어스타일을 바꾸자마자, 가벼운 톤의 작품들이 갑자기 쏟아지더라고요. 한동안 이런 밝은 톤의 역할만 맡고 싶어요.”
신민아·이제훈과 함께 출연하는 TV 드라마 ‘내일 그대와’(가제, 2017년 방영 예정, tvN)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고요.
“‘걷기왕’의 수지와 마찬가지로 밝은 캐릭터예요. 극 중 이제훈·강기둥과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인 건축가를 연기해요. 드라마 촬영 현장 자체가 순발력을 많이 요구하는 데다, 독립영화와 달리 제 연기를 모니터할 기회가 좀체 없어서 처음엔 무척 긴장되고 떨렸어요. 지금은 ‘어떻게 하면 다른 배우들과 좀 더 생생한 장면을 만들 수 있을까’ 궁리하며 연기하고 있어요.”
2년 전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귀여운 배우가 꿈”이라 말했죠. 여전히 그 꿈은 변함없나요
“같아요. 사람이든 사물이든, 제가 지금 가장 매력적으로 느끼는 미덕은 ‘귀여움’이에요.”
그동안 스스로가 좀 더 귀여워진 것 같나요.
“제 자신을 더 감추지 않게 된 것만은 분명해요. 가면 따윈 쓰고 있지 않습니다(웃음).”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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