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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는 마라톤, 만평은 100m달리기…둘 다 짜릿

중앙일보 2016.11.29 01:04 종합 23면 지면보기
일제강점기 독립군들의 활약을 그린 만화 『폭탄아』의 주인공 탄아 옆에 선 박기정 화백. 그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 만화를 읽고 나라와 애국심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복간했다”고 말했다. [사진 김춘식 기자]

일제강점기 독립군들의 활약을 그린 만화 『폭탄아』의 주인공 탄아 옆에 선 박기정 화백. 그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 만화를 읽고 나라와 애국심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복간했다”고 말했다. [사진 김춘식 기자]

1935년 만주 용정에서 태어났다. 벌판에서 뛰놀며 자란 소년은 어른이 되면 마도로스가 돼 바다 너머 세상을 만나고 싶었다. 해방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지만 도시는 좁고 답답했다. 그래서 도화지에 넓은 세계를 떠도는 주인공들을 맘껏 그리기 시작했다. 60년대 최고 인기를 누렸던 만화 『도전자』 『폭탄아』 『레슬러』 등을 그린 박기정(81) 화백 이야기다.

박기정 화백 만화인생 60돌 특별전

56년 네 컷 만화 ‘공수재’로 데뷔한 박 화백의 만화인생 6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 ‘박기정의 도전’이 경기도 부천 한국만화박물관에서 내년 4월 9일까지 열린다. 지난 23일 전시장에서 만난 박 화백은 64년 출간된 만화 『치마부대』의 표지를 한참 들여다봤다. “여자 축구팀이 남자팀을 시원하게 이기는 내용인데, 당시로는 무척 파격적이었다고. 여학생들이 속이 뻥 뚫린다며 팬레터도 많이 보내왔지.”

박 화백은 한국 만화계에선 드물게 극만화와 시사만화 양쪽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번 전시에선 ‘도전’을 키워드로 그의 작품세계를 돌아본다. 우선 극만화 작가로서의 도전. 60~70년대 대본소(만화방) 만화 전성기에 그는 이두호·이우정·박흥용 등의 문하생과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쏟아내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림이든 내용이든 남들이 하지 않는 독창적인 걸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지. 혹시 무의식 중에 모방을 할까봐 데뷔한 후론 만화를 전혀 안 봤을 정도니까. 스포츠에서 액션, 순정까지 머리 속에서 늘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그걸 놓칠까봐 운전도 그만뒀어.”
2006년 복간된 『도전자』에 이어 이번에 새로 출간된 『폭탄아』(1964·사진)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일본군에 잠입한 독립군 스파이들의 활약을 그린 대하서사극이다. 일본군 정보를 빼내는 비밀조직 ‘DDM’(대한독립만세)과, 일본이 독립군에 심은 스파이 ‘NN’(니폰 닌자)의 대결이 흥미진진하다. 60권 넘게 나온 단행본 중 여러 권이 유실돼 이번 복간을 위해 박 화백이 상당 부분을 새로 그려야 했다. 그는 “당시엔 검열이 심해 사랑 이야기는 거의 넣을 수 없었다”며 “이번에 기억을 거슬러 이야기를 맞춰가며, 그리고 싶던 장면을 맘껏 그렸다”며 웃었다.

극만화가로 전성기였던 78년, 그는 중앙일보에 입사해 만평가이자 인물 캐리커처 작가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프리랜서로 계속 시사 만화를 그려왔지만, 한 회사에 소속돼 매일 마감에 시달리니 그 부담이 엄청나더라고. 엄혹한 시대라 협박 전화도 수없이 받았고, 그 스트레스를 매일 술로 풀었지.” 하지만 한 장면에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만평의 매력은 중독적이었다. 그는 “극만화가 마라톤이라면 시사만화는 100m 달리기”라며 “짜릿하지만 그만큼 힘들어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씩 편집자가 사무실 문을 열며 마감을 독촉하는 꿈을 꾼다”고 했다.

2011년 중앙일보를 그만둔 후로도 그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전시장 한 켠에선 박 화백이 요즘 그리고 있는 스케치를 볼 수 있다. “끝내주는 야구 만화 콘티까지 다 짜 놓았는데, 너무 대형 작업이라 시작을 못했어. 강아지·고양이·원숭이를 주인공으로 한 풍자만화도 한번 해보고 싶어 요즘 캐릭터를 구상 중이야.” 한참 신작 줄거리를 설명하던 그가 눈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물었다. “어때? 재밌을 것 같나?”

글=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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