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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함성의 의미

중앙일보 2016.11.29 01:00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우리나라 현대사는 민주화로 향하는 사건 사고로 점철되어 있다. 어둠이 짙어 갈 무렵이면 건강한 힘들이 앞길을 밝혀 주었다. 1960년에는 학생들이 주체가 되었고, 87년에는 학생들과 소위 넥타이 부대가 연합해 새로운 물길을 열었다. 이제 또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시민 전체가 촛불을 들어 어둠을 밝히고 있다. 유모차가 화염병과 최루가스가 있던 자리를 대신하고, 평화의 노래가 광장을 울린다.

청와대를 출발점으로 퍼져 나간 사건과 의혹이 엄청난 분노를 촉발했는데도 국민들은 성숙한 모습으로 대응하고 있다. 직장인·주부·학생들을 포함하는 국민 전체가 넓은 광장에서 공의를 외치는 광경은 청와대의 음습한 구석에서 권력을 쥔 소수의 세력이 음모를 꾀하는 비루한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절제하며 평화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모습은 알량한 권력에 빌붙어 위협·협박으로 사익을 취하려 한 농단 세력의 천박한 모습과 또다시 대조를 이룬다. 바야흐로 명예로운 시민혁명의 진행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광장에 서면 시민의식의 성숙을 볼 수 있지만, 이번 사태의 전개 속에는 전혀 다른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이 숨어 있다. 비리에 연루되어 이름이 오르내리는 정치인들만이 청와대발 막장 드라마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최순실이라는 이름에 경기를 일으키며 모른다고 호들갑을 떠는 이들의 모습이 경멸스럽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겠다”고 선서한 대통령이 권력을 이용해 범법 행위를 하는 동안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직무를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 국회의원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 본분을 다했다면 이 추운 겨울에 시민들이 광화문에 나와 고운 손을 비비며 촛불을 들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검찰은 이 정도로 곪아터진 사안에 대해 한 방송사가 태블릿 PC를 줍는 순간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이제 와서 정의의 사도인 양 부지런을 떠는 모습이 왠지 초라하다.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하겠다”고 다짐한 검사들이 제 역할을 해주었다면 시민들이 광장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언론은 모르고 있었을까? 이 짧은 시간에 그 많은 내용을 파헤칠 수 있는 언론이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는 비리의 덩어리에 전혀 촉이 닿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면 매우 구차한 변명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오른팔로서 비리로부터 공익을 보호하고 공공의식을 창출하는 감시 장치”인 언론이 제 자리를 지켜 주었다면….

미국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은 원칙을 지키는 것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 말한다. 원칙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고 행위를 예측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조율할 수 있다. 원칙이 없이 행동한다면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상대방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없게 되고, 그런 사회는 신뢰가 소멸되어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요동칠 수밖에 없다.

원칙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한 지도층의 민낯이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났고, 사회 전체에 짙은 불신의 그림자를 던진다. 많은 사람이 현 상황에 대한 경악·분노와 함께 무력감과 우울감을 호소하고 있다. 이 우울감은 시스템 전체에 대한 포괄적 실망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가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지도층의 통렬한 반성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원칙이 붕괴되며 나타난 불신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광장에서 외치는 정의의 함성에서 우리는 신뢰의 붕괴에 대한 국민의 통탄을 읽어야 한다. 대의를 읽지 못하고 아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대통령, 격조 없는 언사와 끈질긴 기회주의적 공방으로 아직도 이전투구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정치인들이 과연 시민들의 명예로운 외침의 의미를 알고 있기나 한 걸까?

김 기 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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