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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여야, 트럼프에게 배워라

중앙일보 2016.11.28 19:07 종합 31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노예해방을 놓고 4년간 이어진 미국 남북전쟁은 여러 면에서 특별했다. 우선 유례없는 희생자가 났다. 전체 인구 3100만 명의 3%인 103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독립 후 240년 동안 미국이 치른 다른 모든 전쟁의 사상자를 합친 수준이다. 기관총이 나왔는데도 뻣뻣이 선 채 줄지어 돌격하는 나폴레옹식 전법을 고수한 탓이었다.

 이토록 처절한 살육전임에도 가혹한 보복과 무거운 배상금 부과가 없었다는 것도 특이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이끌던 북부는 항복해온 남군 모두를 아무 조건 없이 귀가시켜다. 남군 장교에겐 권총 소지마저 허용했다. 심지어 총사령관이던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은 북군 병사들이 승리에 도취돼 함성을 지르자 이를 말리며 이렇게 말한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 반군도 다시 우리 국민이 된 것이다.” 남군 측 슬픔을 배려한 조치였다. 이 모두 국민적 통합을 위해서였다.

 이런 전통 덕인지 요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통합을 입에 달고 산다. 지난 23일 추수감사절 때에도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의 나라로 나아가길 기도한다”는 통합의 메시지를 냈다. 더 이목을 끈 건 전날인 22일 이뤄진 뉴욕타임스(NYT) 본사 전격 방문이었다. NYT는 선거 내내 트럼프 공격에 앞장섰던 매체였다. 누가 보든 국민적 통합 차원에서 적대적인 언론에 먼저 손을 내민 거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도 당선인 시절 신문사나 언론사 행사에 간 적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방문은 완전 딴판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한겨레 신문을 찾았고 이명박 당선인은 조선일보 행사에 갔다. 모두 자신과 성향이 맞는 언론사를 방문한 것이다.

 그나마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달랐다. 그는 당선되자 조선·동아일보 관련 행사부터 챙겼다. ‘정치 9단’이란 명성에 걸맞게 통합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모양이다.

 최순실 게이트로 흉흉한 요즘, 정치권에서는 통합은커녕 편가르기와 상대방 공격을 위한 막말만 쏟아진다.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찍은 이들이라고 분노하지 않는 게 아니다. 이들의 대부분도 배신감에 치를 떤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의 하야 또는 탄핵을 바란다는 응답이 90%를 넘은 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이런 판에 여당 전체를 ‘부역자’ 집단으로 매도하고 다른 당 대표에 대해 “똥볼을 찼다”고 비난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여야가 위험천만한 인물로 우려했던 트럼프에게 배워야 할 처지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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