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소문 포럼] 민심은 뜨겁고, 국민은 착하다

중앙일보 2016.11.28 01:00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기아 부도 사태 이후 금융위기 대란 루머로 혼란’ ‘연쇄 부도는 한국 경제의 취약점을 고쳐가는 과정일 뿐’ ‘전문적인 악성 루머 날조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 뿌리 뽑아야’ ‘외국 언론, 한국 경제 비관-정부 왜곡에 강력 대응’-.

1997년 초부터 11월 초순까지 언론에 보도된 기사 제목이다. 그해 11월 22일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급한 불을 껐다. 국가 부도 위기는 그렇게 갑자기 닥쳤다. 하기야 당시 김영삼 대통령도 11월 10일 강경식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통화하기 전까지는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경제 컨트롤타워가 마비상태였던 셈이다. 영문도 모르는 국민은 망연자실 주저앉았다. 고스란히 그 부담을 떠안았다. 한 집 건너 실직자가 생겼다. 기업은 줄줄이 부도열차에 올랐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딘 청년은 고용절벽에 좌절했다. 그렇게 시작된 취업전선의 아우성은 지금까지 좀처럼 끊어지지 않고 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꼭 19년 전인 97년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건 ‘어쩌면 이렇게 현 상황과 빼다박은 듯 같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지금 최순실이 있다면 당시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가 있었다. 국정 농단의 실세는 존재를 숨긴 채 음지에서 최고 권력자인양 군림했다. 여기에 전직 대통령이 연루된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돈을 댄 기업은 “우리가 봉”이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뒷돈을 찔러 준 기업과 뇌물죄 혐의를 받는 대통령이 얽힌 지금과 뭐가 다른지 가늠이 잘 안 된다.

경제 해법을 놓고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달라지지 않았다. 10조원의 빚더미에 눌린 기아자동차의 해법을 놓고 당시 당정이 충돌했다. 법정관리냐, 화의(和議)냐를 두고 강경식 부총리와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가 혼선을 빚으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진해운이나 조선업종의 처리를 두고 삐걱대는 지금과 흡사하다. 경제 컨트롤타워 실종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마저 절묘하게 겹친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이 한국 자동차시장에 수퍼 301조를 발동하며 압박했다.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가 꺼내 든 보호무역주의와 완벽하게 오버랩된다.

그런데도 당시엔 “한국 경제가 불황의 마지막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는 식의 낙관론이 언론을 장식했다. 심지어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한국은행은 구제금융을 받기 한 달 전까지 “올해 경제성장률이 6%를 넘을 것’이라고 했다. 쩍쩍 소리를 내며 금 가는 경제에 덧칠만 해댄 꼴이다. 그러면서 ‘성장률 0%대의 빈사상태에 빠진 일본’을 걱정하기까지 했다. 그때와 다른 건 일본은 경제 저점을 찍었고, 반대로 한국이 0%대 성장이란 늪에서 허덕인다. 언론과 전문가도 한국호에 음습한 경제위기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런데도 경제야 어떻게 돌아가든 정치적 잇속 챙기기가 우선인 모양새는 19년 전과 판박이다. 계파 이익이나 차기 정권을 놓고 수싸움만 한창이다. 공무원마저 일손을 놨다. 국정은 말 그대로 헛돌고 있다. 그사이 금리는 슬금슬금 오르고, 가계부채는 경제의 뇌관으로 부상했다. 기업 구조조정이나 고용시장 개혁 같은 경제체질 개선을 위한 엔진은 꺼졌다. 이로 인한 부담을 정치권이 질까? 천만의 말씀이다. 짐작하다시피 19년 전 그때처럼 결국 국민의 고통으로 바뀐다. 그 고통의 정도에 따라 정치권은 호들갑의 강도만 조절할 뿐이다.

집단 우울증에 걸린 요즘, 경제마저 무너지면 한국호의 앞길에 정말 답이 없다. 광장을 가득 메운 분노와 울림에는 더불어 잘살고자 하는 몸부림이 깔려 있다. 그 몸부림의 또 다른 축인 경제를 챙기는 사람이 안 보인다. 민심은 정치권의 주판 속에서 튕겨지고 있다. 광장의 분노를 원금 삼아 이자놀이를 하는 셈이다.

민심은 뜨겁고, 국민은 착하다. 세계가 주목하는 축제가 된 100만 명의 행렬만 봐도 그렇다. 심리학자 도로시 로는 “착한 사람만 우울증에 걸린다”고 했다. 이들의 우울증을 달랠 약재는 그나마 민생 안정이다. 대통령에게 당하고, 그사이 정치권에 또 당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제발 경제 좀 챙기자.


김 기 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