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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벤치마크는 죄가 없다

중앙일보 2016.11.28 01:00 경제 8면 지면보기
강병철 경제부 기자

강병철
경제부 기자

며칠 전 호주산 와인을 한 잔 마셨다. 그랜트 버지 와이너리의 ‘벤치마크(Benchmark)’. 호주 와인의 ‘기준’을 세우겠다는 포부가 이름에서 읽혀진다. 직업병 때문일까. 최근 여의도 증권가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벤치마크 논란이 떠올랐다.

이 논란은 증권가 사설 정보지인 ‘찌라시’에서 촉발됐다. 국민연금은 올 6월 위탁 운용사에 펀드 유형별로 기준수익률(벤치마크)과 비슷하게 자금을 운용하라는 가이드라인을 내렸다. 벤치마크를 맞추기 위해선 시가총액 비중이 큰 대형주를 살 수밖에 없다.

이런 국민연금의 지침은 정치적 음모에 따라 의도적으로 대형주를 살리고, 중소형주를 죽이기 위해서라는 게 찌라시의 요지다. 이를 두고 중소형주가 폭락한 건 사실이란 얘기와 벤치마크를 따르게 하는 게 뭐가 문제냐는 주장이 다투고 있다.

벤치마크는 여러 영역에서 쓰이는 용어다. 그렇다 보니 벤치마크의 어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건 토목 용어에서 출발했다는 주장이다. 하천을 준설하거나 댐을 세운 뒤 물의 높이(깊이)를 표시(마크)하기 위해 의자(벤치)를 일정 높이마다 설치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의견이다. 어원이 토목에서도 나왔다 치더라도 벤치마크라는 용어를 가장 자주 쓰는 곳이 경영 분야다. 벤치마크에서 파생된 ‘벤치마킹’은 이젠 우리말로 대체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다.

그래서 천문학적 돈이 오가는 자본시장에서 최소한 벤치마크 수준의 수익률을 올리는 것은 기본으로 여겨진다. 글로벌 자산운용사도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혹은 파이낸셜타임스스탁익스체인지(FTSE) 지수를 벤치마크로 삼아 투자 방향을 정한다. 벤치마크보다 낮은 수익률을 낸 펀드의 운용역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말처럼 ‘유 아 파이어드(You are fired)’ 십상이다. 대형주 때문에 중소형주가 죽었다고 탓하기 전에 해당 자산운용사와 펀드매니저의 실력을 우선 의심해야 한다.

이러한 벤치마크 논란에 대한 베테랑 펀드매니저의 일갈이 기억 남는다.

“벤치마크 수익률은커녕 마이너스 수익률을 냈는데도 최근 괴상한 구조의 새로운 펀드를 내세우며 돈을 모으는 자산운용사 대표나 제발 ‘셧 더 마우스(shut the mouth)’ 하길 바란다.”

벤치마크는 죄가 없다. 다만 고객의 소중한 돈을 제대로 못 굴리고도 입만 살아 있는 속칭 ‘찌질이’들과 이들의 말을 퍼담아 나르는 ‘찌라시’가 죄 있을 뿐이다.


강병철
경제부 기자
bong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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