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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상식에 울분 ‘순실증’ 깊어만 간다

중앙일보 2016.11.27 02:41
대학 졸업 후 2년간 행정고시를 준비해 온 조모(26)씨는 최근 공부를 중단했다.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 사건 수사를 지켜보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그간 추진해 온 정책들 가운데 여러 개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면서다. 그는 “아무 자격 없는 비선 실세의 한마디에 국가정책이 오락가락했다는 사실을 알고 화병이 도졌다. 공무원이 돼 봐야 뭐 하겠냐는 허무함 때문에 행시 공부를 접었다”고 말했다.


국정 농단 사태로 인한 정국 혼란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울화통을 터뜨리다 못해 허탈함·무기력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순실증(국정 농단 사태로 우울감·무기력감을 느끼는 증상을 일컫는 신조어)’ 현상이다. 페이스북·트위터 등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순실증을 앓고 있다”는 글들이 봇물처럼 올라오고 있다.


지난달 29일 시작된 박 대통령 퇴진 요구 촛불집회에 회를 거듭할수록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이유 중 하나다.


고재홍 경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세월호 참사, 국정교과서 문제, 고(故) 백남기 농민 사건 등 국정을 엉망진창으로 이끌어온 집단에 대한 누적된 분노의 감정들이 최씨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적 분노의 밑바닥에는 상식의 붕괴에 따른 충격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최근 ‘박근혜 하야하라’는 현수막을 자체 제작해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 내건 주부 최모(41)씨는 “당연히 전 국민을 위해 일했어야 할 대통령이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을 위해 일했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아이들이 어려서 시위엔 못 나가지만 화가 치밀어 현수막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이 범죄행위에 참여한 게 속속 드러나는데 뉘우치는 사람은 없고 전부 자기는 억울하다고들만 한다. 기본 양심조차 없는 이들이 지금껏 비선과 청와대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점에 국민들이 좌절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평등·공정 등의 가치가 무시됐다는 점도 분노를 부추긴 것으로 분석됐다. 건설사 과장인 최모(37)씨는 정유라씨가 시중은행에서 3억원의 대출을 받으면서 0.8% 금리를 적용받았다는 보도를 본 직후 그 은행에 전화했다. 최씨는 “내가 받은 1억원의 대출채무에 대해서도 동일한 금리를 적용해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우리 사회의 오랜 기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이토록 불공정했던가를 알게 되면서 집단의 좌절감이 작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울분을 토로하는 이들은 특정 세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청소년부터 기성세대까지 전 국민이 유사한 분노를 표출한다. 서울 관악구의 한 중학교 1학년생인 이모(13)군의 반에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친구에게 “너 박근혜 대통령이냐”라고 말하는 게 유행이다. 이군은 “게임 얘기 대신 최순실씨 얘기를 친구들이랑 더 많이 한다”며 “교과서에서 배운 대통령의 모습과 현실이 너무 달라 실망이 크다”고 말했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가세하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7년째 살고 있는 김모(28·여)씨는 지난 12일 현지에서 열린 ‘트럼프 반대’ 시위에 ‘박근혜 퇴진 OUT’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나갔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심 끝에 이곳에서도 분노하는 국민이 있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 나갔다”고 말했다.


순실증은 나날이 확산되고 있지만 치유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잊을 만하면 상식을 붕괴하는 새로운 소재거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굿판 논란’에서부터 박 대통령이 드라마 시크릿 가든 여자 주인공 이름인 ‘길라임’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는 의혹, 청와대에서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를 대량 구매했다는 폭로까지 자극적인 소재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후폭풍이 클 것이라고 우려한다. 구정우 교수는 “전 국민이 이 사태를 지켜보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적 에너지 손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고 지적했다.


박민제·윤재영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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