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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세 수사 안한다고 대사헌 탄핵, 독립적 인사권에 왕도 개입 못해

중앙선데이 2016.11.27 01:06 507호 11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한 사회의 정의가 실현되려면 사법기관이 살아 있어야 한다. 조선에서 그런 사법기관은 사헌부(司憲府)였다. 지금의 검찰과 비슷하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검찰과 비교하면 사헌부 선비들이 펄쩍 뛸 것이다. 권한은 지금의 검찰이 더 막강하지만 실제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다.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은 종2품으로 차관급이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은 사헌부에 대해 “현행 정사에 대해 논집(論執)하고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고, 참람하고 거짓된 것을 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행 정사를 논집하는 기능이 백관에 대한 탄핵권이고, 백관을 규찰하는 기능이 수사권이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것은 바로 권력자의 전횡에 맞서 힘없는 백성들을 보호하는 사회정의 실현 기능이다. 조광조가 거대 공신집단 해체의 칼을 든 것도 대사헌 자격이었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어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복(感服)해서 그가 밖으로 나가면 시장 사람들이 말 앞에 모여들어 ‘우리 상전(上典:주인)이 오셨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대사헌 조광조가 권력집단에 맞서 사회정의를 실현했기 때문에 힘없는 백성들은 그를 주인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의 검찰, 사헌부

?연려실기술?은 관직전고(官職典故)에서 “사헌부 관원이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관료가 떨고 두려워한다”고 전하고 있다. 사헌부의 이런 권위는 조광조처럼 살아 있는 권력에 칼을 들이댔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검찰은 거꾸로다. 현재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주곡인 ‘정윤회 문건파동’ 때 서울경찰청 정보분실 소속의 최경락 경위는 자살로 내몰리고 한일 전 경위는 구속되었다. 만약 검찰이 당시 명령에 따른 애꿎은 중하위 경찰공무원들이 아니라 최순실을 겨냥했다면 지금의 국정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조사받으러 간 검찰청사에서 팔짱 끼며 웃음 짓고, 검사는 그 옆에서 공손히 두 손 모으는 사진이 검찰의 현주소를 대변한다. 거리의 촛불 때문에 청와대의 힘이 빠지지 않았다면 그간의 검찰 행태로서 어찌 간이 떨려서 감히 청와대를 쳐다나 볼 수 있었겠는가.



자신들의 사법권 행사에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 사헌부 관원들은 피나는 노력을 했다. 조정 회의에 참석할 때는 가장 먼저 참석해서 회의가 끝나면 가장 늦게 나갔다. 다른 관원들과 섞여서 출입하는 사이 청탁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사헌부 내부의 위계질서는 엄격했지만 문제가 있으면 수장인 대사헌도 거침없이 탄핵했다. 명종 16년(1561) 4월 사헌부는 대사헌 송기수를 파직시켜 달라고 주청했다. 송기수가 왕비의 인척들이자 권력 실세인 이량과 윤원형을 탄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검사동일체’ 운운하는 조직 논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헌부의 권위는 청렴에서 나왔다. ?연려실기술?은 사헌부에 대해 “심히 맑아서 물력(物力)이 없다”고 표현했다. 사헌부 핵심인 정6품 감찰(監察)에 대해선 “남루한 옷에 좋지 않은 말과 찢어진 안장, 짧은 사모에 해진 띠를 착용한다”고 전한다. 사헌부 관원들은 친구가 세상을 떠났어도 함부로 조상하지 않았다. 장례 후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반혼(返魂) 때 영거(靈車:신주를 싣는 가마)가 지난 다음에야 맨 뒤에 홀로 따라가 홀로 조문하고 홀로 돌아오는 것이 조문 방식이었다. 이런 처신으로 사헌부 관원들은 자신들의 사법권 행사에 대한 사회의 동의와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사헌부에 사법 독점권을 주지 않았다. 사법권을 여러 수사기관에 나누어 놓았다. 사헌부뿐만 아니라 의금부·형조·포도청·한성부 등도 수사권을 갖고 있었다. 의금부는 야당에서 설치하자고 주장하는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와 비슷한 기관이다. 포도청은 현재의 경찰청과 유사하다. 사법기관을 서로 견제시켜서 사헌부가 이런저런 사유로 수사를 방기하면 의금부가 나서서 사헌부 관원을 구속시키고 수사에 들어갔다.



백관에 대한 탄핵권이 있는 사헌부와 사간원(司諫院)을 양사(兩司) 또는 대간(臺諫)이라고 불렀다. 공직자 염치를 중시했던 조선은 탄핵을 당하면 무조건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때문에 양사의 권한은 막강했다. 심지어 소문만으로 탄핵하는 풍문탄핵제(風聞彈劾制)도 있었다. 좋지 않은 풍문이 들리는 것 자체가 공직자의 처신 문제라는 것이다. 태종과 세종이 풍문탄핵을 금지시켰지만 사헌부는 좌천당하는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풍문탄핵을 계속했고, 하나의 관례로 정착됐다.



양사의 권한이 막강한 만큼 양사를 장악하려는 권력층의 의도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처럼 민정수석이 검찰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제도적으로 불가능했다. 양사의 인사권은 이조판서나 정승이 아니라 지금의 차관보 정도인 정3품 이조전랑(吏曹銓郞)에게 있었다. 임금도 개입하지 못했다. 여기에 권력자들이 이조전랑 인사에 개입할 것을 우려해 이조전랑 인사권은 전임자가 이임하면서 후임자를 추천하는 전랑자천제(銓郞自薦制)를 실시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천거 기준은 사론(士論), 즉 선비들의 여론이었다. 사대사화(四大士禍) 끝에 정권을 잡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된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선조 때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된 게 발단이었다. 김효원이 적격자라는 선비들과 부적합하다는 선비들의 사론이 갈려 선조 8년(1575년)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된 것이다.



현재 인사권 자체가 독립돼 있지 않은 검찰을 두고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기관과 맞서라는 요구가 무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의 사헌부 관원들처럼 선비정신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진경준?김형준 사건에서 보듯이 선비는커녕 시정잡배만도 못한 검사들이 수두룩하다.



우리 사회가 ‘헬조선’이 된 뿌리를 찾으면 예외 없이 일제강점기 때와 맞닿아 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1912년 3월 제령(制令:총독의 명령) 11호로 이른바 ‘조선형사령’을 공포하면서 수사권·기소권을 검찰에 몰아준 것이 현재 검찰이 갖고 있는 수사·기소독점권의 뿌리다. 독립운동가를 쉽게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형사령’에는 상호 모순도 많았다. 11조에 “검사는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 수사 결과 급속한 처분을 요하는 것이라 사료될 때는 공소제기 전에 영장을 발부해 검증, 수색, 물건압수를 하고 피고인?증인을 신문하거나 또는 감정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행범인 사건’이 아니라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고, 영장을 ‘신청’이 아니라 ‘발부’라고 규정한 것은 독립운동가들을 마음대로 때려잡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의 촛불정국이 ㉠이라는 대통령을 ㉡이라는 대통령으로 바꾸는 저차원에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이참에 한국 사회의 후진적 제도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길이 ‘촛불정신’이어야 한다. 명실상부하게 모든 권력이 국민들로부터 나오는 나라,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촛불이 추구하는 직접 민주주의 정신이다. 이런 정신은 각종 불합리한 제도와 법률을 바꾸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제일 앞자리에 검찰 개혁이 자리 잡아야 한다.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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