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부 스스로 당장 폐기는 부담, 1년 유예 뒤 차기정부로 넘길듯

중앙선데이 2016.11.27 01:04 507호 12면 지면보기

이준식 부총리(왼쪽)가 25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참석해 답변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국정화 강행 여부에 대해 “국민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오종택 기자



교육부가 청와대와의 충돌까지 감수하면서 한국사 국정교과서의 재검토 입장을 밝힌 것은 사실상 폐기 수순에 돌입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계속되는 촛불시위로 국정교과서에 대한 반대 여론이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국정화를 포기하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핵심 사업이었던 국정교과서를 현장에 적용조차 못 해보고 접는 것은 교육부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다. 그래서 이번 재검토 카드는 교육부의 명분을 최대한 살리면서 자연스럽게 철회 과정으로 가는 ‘질서 있는 퇴진’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교육부, 한국사 국정 교과서 재검토

 

[국정화 강행 왜 철회했나]

교육부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발생 직후까지도 국정화 강행 입장을 유지했다. 대통령 꼬리표가 붙은 모든 정책이 표류하는 상황에도 국정화를 고수했다. 국정화 강행이 대통령의 업무 계속 의지라는 시각이 제기되자 ‘국정교과서=박근혜’라는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대한민국 역사교과서’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국정화의 동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박정희 미화’라는 지적을 받지 않기 위해 박정희 정부에 대한 편향성 시비가 없도록 꼼꼼히 따졌다. 그러나 남은 것은 ‘최순실 교과서’라는 비난뿐이었다.



실제로 국정교과서를 바라보는 여론의 시선은 매우 싸늘하다. 보수·진보, 기성·청년세대 할 것 없이 대부분 반대한다. 26일 촛불시위에도 국정화를 반대하는 피켓과 현수막이 넘쳤다. 전국 102개 대학 역사·역사교육 관련 교수 561명은 지난주 두 차례에 걸쳐 “국정화 강행 시 반대운동을 벌이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심지어 국정교과서를 지지했던 보수 성향의 교원단체인 한국교총까지 국정화 반대 결의문을 냈다. 주진오 상명대 사학과 교수는 “국정교과서가 공개되는 순간 시비와 혼란에 휘말려 민심 폭발의 또 다른 뇌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4일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는 전체회의를 열고 협의회 차원에선 처음으로 국정교과서 반대 성명을 냈다. 국정화 강행 시에는 “어떤 협조도 거부하고 국정화의 폐해를 막기 위해 모든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지역 학교에선 거부 운동도 벌어졌다. 광주광역시의 경우 전체 90개 중학교 중 88곳이 내년 1학년 1학기에 역사를 편성하지 않기로 했다. 새 교과서는 내년 신입생부터 적용되는데, 역사 과목을 편성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국정교과서를 쓰지 않게 된다. 교육부 관계자는 “국정화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연일 커지고 있어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예정대로 정부가 만든 한국사(고등학교) 및 역사1·2(중학교) 국정교과서는 28일 공개된다. 다만 교육부는 한 달 정도 국민의 의견을 들어 국정화 추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발표할 계획이다. 그렇다면 왜 한 달일까. 이유는 두 가지다. 내년 3월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이 교과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절차상 늦어도 12월 말까지는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한다. 또 다른 이유는 12월 예고된 청와대의 상황 변화다. 12월 초 대통령 탄핵 일정 등 정국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폐기되는 수순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탄핵과 맞물려 국정교과서를 폐기하는 것은 교육부 입장에선 부담이다.



현재 교육부가 바라는 시나리오는 국정화를 1년 유예하고 차기 내각에 넘기는 방안이다. 당초 국정교과서의 모태가 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은 원래 2018년부터 적용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내 추진을 위해 2017년으로 앞당겨진 상황이었다. 교육부의 한 퇴직 관료는 “온갖 난리법석을 떨면서 국정교과서를 추진해 놓고 한 달 만에 포기해버리는 건 정부 입장에선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원래대로 새 교과서의 적용 시점을 2018년으로 하고 1년 동안 국정화 여부를 재검토하며 기회를 보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쓰도록 돼 있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적용 시점을 2017년에서 2018년으로 늦추도록 교육부 고시를 개정해야 한다. 고시 개정을 위한 행정예고(25~30일), 각 학교의 교과서 선정·주문과 출판사의 생산·배포(한 달)까지 약 두 달이 걸린다. 늦어도 12월 말까지는 고시를 개정해야만 학교 현장에 차질이 없다. 이후 내년에는 현재의 검정교과서를 그대로 쓰면서 1년간 국정화 여부를 재검토하면 된다. 그러나 1년을 재검토한다고 해도 국정화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매우 작다. 국민의 반대가 매우 큰 상황에서 차기 내각, 또는 다음 정권이 국정화를 지속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국정·검정 논란보다 질 좋은 교과서 필요”]

그렇기 때문에 교육부가 구상하는 최선의 방안은 2018년부터 국·검정 혼용이다. 실제로 이준식 부총리는 25일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 결정하되 국정교과서가 현장에서 쓰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교과서가 학교 현장에서 책을 펴보지도 못한 채 사장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선 국정과 검정 중 하나만 쓰도록 돼 있는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고 2017년 한 해 동안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검정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 현재의 검정교과서는 2009 개정 교육과정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분위기에서 국·검정 혼용을 하더라도 국정을 선택할 학교가 그리 많아 보이진 않는다. 결국 국정교과서는 폐지 수순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국정이냐 검정이냐를 놓고 교육계와 정치권이 싸우고 있는 사이 가장 피해를 보는 건 학생들이다. 당장 서울·강원·세종·광주·전북교육청 등은 국정교과서를 대체할 ‘대안 교과서’(보조교재)를 만들고 있다. 국정교과서와 보조교재는 주요 쟁점마다 상반된 시각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국정교과서는 1948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표기해 이때를 건국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보조교재는 48년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명시하고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보고 있다. 학생 입장에선 어느 것을 역사로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하윤수 한국교총 회장은 “국정이냐 검정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가 기록된 질 좋은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석만·노진호 기자 sam@joongang.co.kr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