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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다시 만난 세계’

중앙선데이 2016.11.27 00:24 507호 29면 지면보기
지난 19일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이 집회를 마무리하고 행진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일명 ‘학익진’ 대형으로 청와대를 동ㆍ남ㆍ서쪽에서 에워싸려는 발걸음이 분주하던 때, 광화문 네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애절한 노래 가락이 들렸다. 베레모를 쓴 중년 남성이 부는 트럼펫 소리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기려 만든 노래 아니던가. 당시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은 윤상원씨와 앞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씨의 영혼 결혼식을 담은 노래굿.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마지막 구절은 1980~90년대 집회 현장을 뜨겁게 달궜다. 비장하게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행진하게 했다.



광화문 광장의 트럼펫 소리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듯했다. 주변 사람들도 화답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아뿔싸, 가사를 아는 이가 많지 않았다. 청중들은 박수로 중년 남성의 연주에 힘을 보탰다.


달라진 집회 현장의 노래

변화는 진작에 관찰됐다. 지난 7월 30일 이화여대에서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평생교육 단과대학인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을 반대하던 학생들은 본관 점거 농성을 펼치고 있었다. 경찰이 들이닥쳤다. 팽팽한 대치 상황에서 학생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노래했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만,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중략>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아침 이슬’ ‘바위처럼’ 같은 정통 민중가요가 아니었다. 걸 그룹 소녀시대의 2007년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다만세)’였다. 소녀의 꿈과 모험을 향한 첫 걸음을 응원하는 내용을 담은 노래다. 학생들은 특히 ‘포기할 수 없어’ ‘안녕’ ‘쫓아가’와 같은 구절에서 목청을 돋웠다. JTBC 뉴스룸의 손석희 앵커는 앵커 브리핑에서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던 그들의 노래는 투쟁가가 아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만난 세계는 민망하고도 음험한 어른들의 세계였을까요”라며 현장을 소개했다.



이화여대 미래라이프 대학 사태는 정유라의 입학 의혹으로, 최순실로,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으로 확산됐다. 밀레니얼 세대의 투쟁가로 떠오른 ‘다만세’도 학교 담장을 넘었다. 이제 광화문 광장의 촛불 사이에서 더 큰 ‘떼창’으로 불리는 게 낯설지 않다.



광장을 메우는 노래들도 달라지고 있다. 12일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메인 무대에서 이승환은 ‘덩크슛’의 후렴구를 “주문을 외워보자/ 오예~하야하라 박근혜 하야하라”라고 바꿔 불렀다. 남성 듀오 십센치는 ‘아메리카노’ 중 “아메리카노 좋아 좋아 좋아” 부분을 “박근혜 하야 좋아 좋아 좋아”로 개사해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펑크락 밴드 크라잉넛은 “말은 독일로 달려가는 게 아니다. 이화여대로 달려가는 게 아니다. 달려야 할 곳은 청와대”라며 히트곡 ‘말 달리자’를 불렀다. 격앙된 목소리 대신 광장에는 풍자가 넘쳤다. 운동권 인사 위주로 참석하던 시위 문화가 전 연령대의 국민이 참여하는 촛불 문화제가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집회의 메인 무대도 운동권 노래패 대신 이승환·전인권·윤도현 같은 대중가수가 차지했다. 익숙한 대중가요를 개사한 노래에 사람들은 공감하고 화합했다.



광장을 메우는 노래가 민중가요든 대중가요든, 록이든 아이돌 댄스음악이든 간에 뭣이 중요하겠는가. 담긴 메시지는 분명 하나일 테다. 수백만이 포기하지 않고 토요일마다 청와대를 향해 합창하고 있다. 절절한 진심이 노래와 만나 세상을 바꾸는 새 물결을 만들고 있다.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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