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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부당한 것을 요구하는 남자, 거절하지 못하는 여자

중앙일보 2016.11.26 01:00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형경 소설가

김형경
소설가

남자의 부적절한 접근에 대응해 온 방식들. 20대에는 적절한 대처는커녕, 그 상황을 이해조차 할 수 없어 혼자 화내며 친구에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니?” 인간의 속성을 조금 이해한 서른 살 무렵에는 직함을 과시하며 술 한잔하자는 제안에 이렇게 대응했다. “제가 왜 선생님과 술을 마셔야 하죠?” 불쾌감을 상대에게 전하는 방식이었다. 좀 더 나이 든 이후에는 능청스러워졌다. “내가 그렇게 좋으면 이혼하고 와.” 혹은 상냥하게 말했다. “선배를 존경하지만, 제게 작업은 걸지 마세요.”

간혹, 여자를 추구하는 것을 생의 유일한 즐거움으로 여기는 남자가 있다. 그들은 섹스할 때만 살아 있다는 생생한 느낌을 맛본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무의식은 다른 원리로 작동한다. 불안이나 분노를 섹스를 통해 푸는 경우, 섹스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길이라 여기는 경우, 아내에게 패권을 잃고 복수의 방법으로 외도하는 경우, 어렵게 손에 넣은 권력을 마음껏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등. 거기에 덧붙일 중요한 심리 한 가지는 그가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장난감을 손에 넣을 때까지 떼쓰는 아이처럼, 어떤 요구든 세상이 충족시켜 줘야 한다는 무의식에 지배당한다. 욕구 좌절의 유년기에 고착된 마음이다.
 
간혹, 남자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여자도 있다. 단지 나이가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인 경우가 있다. 물리적·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남자의 권력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다. 심리적으로 힘이 약한 이유도 있다. 당당하게 거절한 후 불합리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감당하겠다고 다짐할 만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낡은 관습의 잔재 때문이기도 하다. 여자의 생존이 오직 남자에게 귀속돼 있던 시대의 경험이 유전자에 남아 오늘도 여성은 남자의 요구를 거절하는 일에 근거 모를 어려움을 느낀다. 거기에 덧붙일 중요한 심리 한 가지는 그녀가 ‘거절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착하고 온순하게 굴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무의식에 지배당하고 있으며, 양육자의 안정적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까닭이다.

부당한 것을 요구하는 남자도, 거절하지 못하는 여자도 맹점이 시작되는 곳은 유년기다. 그들은 세상이 따뜻하고 온정 넘치기를, 타인이 좋은 것을 주기를 기대한다. 가끔 후배 여성에게 말해 준다. “무언가를 주겠다면서 접근하는 사람은 그만 한 것을 요구하는 속맘이 있어. 네가 젊은 여자라면 그것은 성(性)이야.”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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