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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쓰기, 자기소개서

중앙일보 2016.11.26 01:00 종합 28면 지면보기
정여울 작가

정여울
작가

얼마 전 수능보다도 ‘자기소개서’ 쓰기가 더 고민이라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능에는 정답이라도 있지만 자기소개서에는 모범답안이 없으니, ‘세상에 하나뿐인 나’를 글 한 편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인생에서 뭔가 굵직굵직한 경험이 아직 없는데도 사소한 동아리 활동 등에 뭔가 엄청난 의미 부여를 해야 하니,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소설’을 쓰는 것 같다고 하소연하는 아이들도 있다.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억지로 꾸며내서라도 대학에 합격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아이들의 여린 가슴에 쓰라린 상처를 남긴다. 자소서(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자소설(自小說)’이라고 푸념하는 학생들의 고민이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소개서나 이력서를 쓸 일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직업인 나조차도 자기소개서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글쓰기로 다가온다. 책을 쓸 때마다 책날개에 ‘프로필’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는 것이 본문을 채우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내 마음이 이미 책 속에 구구절절 드러나는데, ‘나’를 프로필이라는 형식에 맞추어 또다시 표현하는 것이 불필요한 동어반복처럼 느껴졌다. 너무 멋들어지게 쓴다면 나를 속이는 일 같아 죄책감이 들 것 같았다. 강의를 할 때마다 매번 이력서를 요구하는 곳도 많다. 지금은 불가피하게 이력서나 프로필을 쓸 때마다 최대한 소박하게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만 쓴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엄청난 자기 분열이 있었다. 글을 통해 나를 멋지게 포장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고, 글을 통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를 성공적으로 감춰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다. 글은 이렇듯 나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는 것이기에, 차마 길들이지 못한 나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는 좀처럼 표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 표현하기 어려운 그림자야말로 진정한 나 자신에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오은 시인은 ‘이력서’라는 시에서 “밥을 먹고 쓰는 것./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이 바로 이력서라고 했다. 밥을 벌어먹기 위해 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순간, 그때 세상을 향해 내밀어야 하는 통행증 같은 것이 바로 이력서이기에. 내 자랑을 하되 아주 겸손하고 은밀하게 해야만 하는 것이 이력서이기에, “나는 잘났고/나는 둥글둥글하고/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오늘밤에도/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이라는 구절을 읽으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이력서는 과연 혼자 추는 왈츠처럼 쓸쓸하고,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어불성설의 몸부림이 아니겠는가.

내 자신을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은 왜 이토록 힘이 드는 것일까. 이력서를 제출해야 하는 대상은 ‘외부’에 있지만, 이력서를 쓰면서 정작 만나야 하는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력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과 마주하는 일이며, 피할 수 없는 외로움과 맞닥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력서나 프로필을 쓸 때마다 내 안의 일부가 조금씩 무너지고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무너지는 것은 자존감이고, 부서지는 것은 자신감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이리도 초라하고 작은가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 그런데 그 자괴감 속에는 뜻밖의 자존감도 깃들어 있었다. 바로 ‘나’라는 존재는 결코 이력서나 프로필로는 요약될 수 없다는 내 안의 외침이었다. 결코 몇 줄의 이력서에 나를 온전히 담을 수 없다는 믿음이야말로 내가 이력서를 쉽게 쓰지 못한 진짜 이유였다. 요즘은 ‘나를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아버렸기에, 나를 표현한다는 일의 강박에서 점점 해방되고 있는 중이다. 당신이 살아온 발자취를 정직하게 꾸밈없이 기록하는 것, 그것이 이력서다. 주눅 들지 말자. 두려워하지 말자.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요약하거나 대신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이니까.

정 여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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