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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나면

중앙일보 2016.11.24 01:00 종합 34면 지면보기
박신홍 EYE24 차장

박신홍
EYE24 차장

올가을엔 유난히 시야가 흐리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데 청명한 가을 하늘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이달 들어 조금이라도 비가 내린 날이 12일이나 됐다. 날씨 ‘맑음’은 4~5일뿐이었고 미세먼지 ‘좋음’은 단 하루였다. 잔뜩 흐린 날씨에 스모그까지 자욱한 11월 늦가을 날씨가 시계 제로의 한국 정치를 쏙 빼닮았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격랑의 시기엔 늘 자기 잇속만 재빠르게 챙기려는 자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권력의 시계추에 따라 180도 변신하는 박쥐형, 한 발 더 나아가 옛 동료와 조직을 헐뜯고 공격하는 하이에나형에서 나 잘났다는 자기과시형까지.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 열성 지지자를 자처하던 각계 지도층 인사들이 “나도 사실은 정의로운 자였어”라며 100만 함성 감상기를 기고하는가 하면 광화문 집회에서 피켓을 들고 하야를 외치는 사진을 너무나 당당히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다.

이들의 처신에서 무능했고, 외면했으며, 편승했던 과거에 대한 자기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세월호 선장과 뭣이 다른가. 정치는 생물이라는데 정국이 요동치면 또 어떻게 변신할 것인가. 영화 ‘친구’의 대사처럼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차라리 ‘박근혜 순장조’를 자처하는 친박계가 오히려 양심적이다 싶을 정도다. 주기도문이 먼저 회개부터 한 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순서로 돼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혼란기를 틈타 감투 챙기느라 혈안이고, 내가 해결하겠다는 영웅심리에 무리하게 앞에 나서며, 눈길을 확 잡아끄는 선정적 발언으로 존재를 과시하려는 자들이 넘쳐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이 말한 ‘인정 욕망’의 극단적인 발현이다. 그 기저에는 타자의 인정을 통해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으려는 조급함, 잘난 나를 왜 세상은 몰라주느냐는 억울함, 한시라도 주류에 끼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경박함이 깔려 있다. 이들에겐 국민의 마음에 못을 박았던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잠잠하던 연못을 휘저으면 그 속에 감춰져 있던 이물질이 모두 드러나듯 격변기일수록 이기적 본성과 얄팍한 내공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게 세상 이치다.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는 가려진다고 했다. 문제는 실제 현실에선 늘 가라지가 알곡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이를 잘 알기에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너도나도 박쥐나 하이에나로 변신하길 주저하지 않는 것일 테다.

19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존 실리는 “역사는 과거의 정치며 정치는 현재의 역사”라고 했다. 과거의 일그러진 모습이 현재의 정치에 그대로 투영되듯 지금 세상을 바로잡지 않으면 미래에도 똑같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경고다. 지금은 정의로운 자 이전에 진실된 자가 필요한 때다. 머지않아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나면 누가 진실했는지, 누가 말로만 정의를 외쳤는지 가려질 것이다. 이를 역사에 분명히 기록해 두자.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라도.


박 신 홍
EYE24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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