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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금융권에도 어른거리는 ‘최순실 그림자’

중앙일보 2016.11.24 01:00 경제 8면 지면보기
이동현 산업부 기자

이동현
산업부 기자

최순실(60·구속)씨 국정 농단 사건을 취재하면서 만난 전직 금융권 고위관계자 A씨는 “금융권에까지 최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가 최씨의 이름을 꺼낸 건 3년 전 사건 때문이다.

2013년 9월 박근혜 대통령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복·아오자이 패션쇼’에선 깜짝 등장했다. 베트남을 국빈 방문 중이던 박 대통령은 경남기업이 1조원을 투자해 지은 ‘랜드마크72’ 컨벤션홀 런웨이에 올라 한복 자태를 뽐냈다. 한달 뒤 주채권은행은 경남기업에 수백억원의 긴급자금을 추가로 대출해줬다. 경남기업은 3000억원이 넘는 당기순손실을 기록 중이었고 두 차례의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을 겪은 상태였다. 며칠 뒤 채권단은 3차 워크아웃을 결정한다. 대주주의 무상감자 없이 1000억원을 출자전환해주고 3400억여원의 신규자금을 투입하는 파격 조건이었다. 채권단은 당초 “대주주의 지분축소(무상감자) 없이는 추가 지원이 어렵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입장을 바꿨다.

2015년 4월 경남기업 대주주였던 고(故)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은 북한산 인근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생을 마감하기 전 성 전 회장은 한 언론인에게 전화를 걸어 “현 정권 유력인사들에게 돈을 건넸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머니에선 유력인사들의 이름과 돈의 액수가 적힌 ‘성완종 리스트’가 발견됐다.

A씨를 접촉한 건 경남기업을 둘러싼 최순실씨의 흔적 때문이었다. 최씨의 측근인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53)씨가 이 패션쇼를 총괄한 사실을 확인하고서다. 김씨는 박 대통령의 취임식 한복을 만들어 유명세를 탄 인물이다. 패션쇼 장소도 다른 건물이었다가 경남기업의 ‘랜드마크72’로 변경됐다.

A씨는 “경남기업의 재무상황이 악화된 건 ‘랜드마크72’에 대한 무리한 투자가 주원인 ”이라며 “3차 워크아웃 직전 추가대출은 여신심사에 보수적인 당시 경남기업 주채권은행 문화를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고, 정권의 압력이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금융권 고위관계자 B씨도 “최씨가 재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기업의 혈관’인 금융권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며 “경남기업 특혜대출과 몰락에 이르는 과정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 정권의 금융 정책에 최씨와 국정농단 사건의 주범들이 개입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아직 없다. 하지만 ‘서별관 회의’로 대표되는 관치금융의 적폐를 해결하지 못한 마당에 이마저 사실로 확인된다면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무자격 민치(民治)금융’이 우리 금융을 쥐고 흔들었다는 의혹이 불온한 상상이길 바랄 뿐이다.

이동현
산업부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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