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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 크리스마스 앞두고 고향 못간 이유는

중앙일보 2016.11.24 00:29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11월 말이면 생각나는 전투가 있다. 미 해병대 제1사단이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와 혹한의 위험 속에서 중공군 제9병단의 포위망을 뚫고 죽음의 통로를 벗어나 철수한 ‘장진호 전투’(1950.11.27~12.11)이다. 얼마 전 국제시장 영화에서 일부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탄 전투이기도 하다.
 
 
중공군의 참전을 간과한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
 
유엔군은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 후 평양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참전으로 청천강까지 후퇴했다. 대규모 중공군의 참전을 인지하지 못한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자며 장병들을 독려하여 11월 24일 일명 크리스마스 총공세를 감행했다. 하지만 미 해병대 제1사단은 개마고원 부근의 유담리를 거쳐 장진을 향해 북상하다가 27일 중공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장진호 부근은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였다. 당시 개마고원 일대에 영하 30도의 혹한에 수일 간의 폭설까지 겹쳐 충분한 방한대책을 갖추지 못한 미군은 또 하나의 적인 동(冬)장군과도 싸워야 했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말 대공세를 펼쳐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막았다.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사단이 철수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중공군은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막았다.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사단이 철수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미군을 포위 격멸하려는 중공군 제9병단
 
중공군 제9병단장 송시륜(宋時輪)은 예하의 12개 사단을 투입해 미 해병대 제1사단을 섬멸한 후, 함흥지역으로 진출해 미 제10군단까지 격멸하고자 했다. 제27군의 4개 사단은 장진호 북방에 전개하여 유담리 일대의 미군을 포위하고, 제20군 4개 사단은 장진호 서쪽으로 우회시켜 철수로를 차단하고, 4개 사단을 예비로 확보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당한 미 해병대는 유엔군의 전폭적인 항공지원 하에 3일간 유담리 일대에서 치열한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방면에서 중공군의 공세가 심해지자 11월30일 유엔군사령부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12월 1일부터 시작된 철수는 도처에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의 집중공격으로 피해가 늘어났다. 미 해병대 제1사단의 주력이 유담리에서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까지 22km를 돌파하는데 무려 77시간이 걸렸으며 피해 또한 컸다. 한편 장진호 동쪽의 미 제7사단도 중공군 2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아 제31연대장을 포함 약 5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장진호전투 요도 [육군 군사연구소 DB]

장진호전투 요도 [육군 군사연구소 DB]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
 
중공군은 4개 사단을 투입하고도 미 해병 2개 연대를 포위 섬멸하는데 실패하자, 추가로 5개 사단을 투입하고 계속 공격하면서 도로상의 모든 교량을 파괴하고 장애물을 설치해 미군을 괴롭혔다. 유엔군사령부는 병력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항공기로 철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해병대 스미스(Oliver P. Smith) 사단장은 항공 철수를 반대하고 육로 철수를 고집했다. 그 이유는 항공 철수를 할 경우 비행장 엄호를 담당할 최소 2개 대대병력의 생사를 보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수많은 전차 및 1,000 여대의 차량을 모두 포기해야하는데, 이를 해병대의 불명예로 여겼기 때문이다.
 
사단장은 밤이나 낮이나 인해전술을 펴며 전후방에서 기습해오는 중공군을 돌파해 나가기 위해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해안까지 ‘새로운 공격’임을 강조하고, 장병들을 격려하며 철수작전을 지휘했다. 12월 6일 새벽에 철수를 개시한 미 해병대 제1사단 주력과 미 제7사단 1개 연대는 다음 날 고토리에 도착했고 1500명의 민간인도 함께 철수했다. 중공군의 끈질긴 파상공격에도 불구하고 미 해병대는 철수로 상의 최대 감제고지인 1081고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며, 붕괴된 수문교 일대의 철수로에 공중 투하된 장비로 6개의 조립교를 만들어 통로를 개척했다. 비록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사단의 주력이 죽음의 협곡에서 빠져나와 11일 저녁에 흥남에 도착함으로써 생지옥 같은 장진호 철수작전은 막을 내렸다.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미 해병대 제1사단이 장진호 철수작전 17일 간 393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약 4,100여 명의 희생이 있었지만 해병대 특유의 용맹성과 감투정신을 발휘해 작전 중에 사망한 동료의 시체까지 모두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중공군 제9병단은 12개 사단을 투입하고도 미 해병대를 포위 섬멸하는데 실패했고, 3만 7000여 명의 전투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투 중 7개 사단의 전투력을 상실한 중공군 제9병단은 차후 공세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미 해병대의 투혼으로 인해 유엔군은 흥남 철수작전의 시간적 여유를 확보했고, 군인 10만 5000명, 민간인 9만 8000명, 차량 만 7500대, 보급품 35만 톤을 흥남에서 부산으로 안전하게 후송할 수 있었다. 실로 위대한 승리인 것이다. 이 전투공로로 17명이 명예대훈장(Medal of Honor)을, 70명이 해군십자훈장을 각각 수상했다.
 
미군들은 장진호를 ‘Chosin Reservoir’로 부른다. 장진호 전투 생존자 및 유가족들은 ‘초신휴(Chosin Few)’ 단체를 결성하여 위대한 승리를 기리며 지속적인 모임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장삼열 한국국방연구원 국방획득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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