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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 <43> 스코틀랜드 맥주 따라 삼만리

중앙일보 2016.11.24 00:01
칼튼 힐에서 바라본 에든버러 전경.

칼튼 힐에서 바라본 에든버러 전경.


‘여행 갈 때 꼭 챙기는 물건이 있나요?’ 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물론 있다. 일일이 늘어놓자면 한두 개가 아니지만, 나만의 비밀병기는 병따개 겸용 볼펜이다. 낮에는 쓱쓱 메모하고, 밤에는 병맥주를 톡 따 주는 고마운 존재다. 여행지에서 냉장고에 맥주를 사서 넣어두는 습관 때문에 병따개가 더욱 필요하다. 간편한 캔 맥주도 좋지만, 병에서 맥주를 유리잔에 따라 색을 보며 마시는 걸 좋아해서다. 더구나 하루 일정을 끝낸 후 숙소에서 마시는 차가운 맥주 한 잔은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니까.
 
스코틀랜드 국민맥주라 불리는 테넌츠.

스코틀랜드 국민맥주라 불리는 테넌츠.


물론, 낮에도 마신다. 작정하고 마신다기 보다 점심 식사 때나, 오후에 갈증이 날 때 가볍게 맥주 한잔. 세계 어딜 가나 그 지역 맥주가 있어서 좋다. 위스키의 나라 스코틀랜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든버러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일가와 135국 600여 개 항구를 누빈 왕실 요트, 로열 브리타니아 호(The Royal Yacht Britania)를 둘러본 후 근처 로즈리프 카페(Roseleaf Cafe)에 들렀을 때다. 동네 펍(Pub)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다. 바에는 신문을 읽으며 맥주를 홀짝이는 노신사와 손님이 올 때 마다 살갑게 안부를 묻는 바텐더가 있었다. 메뉴를 받아들고 스코틀랜드 국민 맥주라 불리는 ‘테넌츠(Tennent's)’부터 한 잔 주문했다. 카트린 호수(Loch Katrine)의 깨끗한 물과 스코틀랜드산 몰트로 만든 ‘테넌츠 1885 라거’는 ‘한잔 더!’를 부르는 상쾌한 맛이었다. 다음 잔은 ‘테넌츠 스카치 에일(Tennent's Scotch Ale)이면 좋으련만, 팔지 않아 마실 수가 없었다. ’테넌츠 스카치 에일‘은 싱글 몰트 위스키를 담아뒀던 오크통에서 3주 숙성시켜 훈연 향과 바닐라 맛이 스민 맥주라고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병맥주로 사서 숙소에서라도 꼭 맛보고 싶었다.
 
동네 펍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로즈리프 카페.

동네 펍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로즈리프 카페.


에든버러에서 출발해, 스코틀랜드 북부 하일랜드 여행하는 동안 도통 맥주를 사러 갈 짬이 나지 않았다. 아예 마트가 없는 시골 마을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스코틀랜드 최대의 도시 글래스고(Glasgow)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맥주를 마음껏 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느지막이 저녁을 먹고 마트에 들렀다. 맥주 판매대로 맹렬히 돌진하다, 마트 직원의 한 마디에 망부석이 되고 말았다. “규정상, 10시 이후에 마트에서 술을 팔지 않아요!” 시계를 보니 10시 7분이었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펍에 가라고 했다. 펍에 가긴 노곤했다. 이튿날도 일정이 빡빡했다. 아, 7분만 빨리 왔어도 하는 아쉬움을 삼킨 채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본격적인 일정 시작 전, 아침부터 산책에 나섰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거리가 촉촉했다. 걷다보니 마트가 보였다. 차라리 지금 맥주를 미리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자 하는 생각에 마트로 들어섰다. 맥주를 골라 계산대로 갔다. 계산원은 맥주 한 번 내 얼굴 한 번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침 10시 전엔 마트에서 술을 팔지 않아요. 10시 이후에 오세요!”
아뿔싸. 고작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왜 누구도 스코틀랜드 마트에서 맥주를 사려면 아침 10시 이후, 밤 10시 이전에 가야 한단 얘기를 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결국, 헛헛한 맘을 달래줄 버터 쿠키만 잔뜩 사 들고 마트를 나서고 말았다.
 
오래된 공장 느낌이 나는 드라이 게이트 양조장 외관.
오래된 공장 느낌이 나는 드라이 게이트 양조장 외관.
드라이 게이트에서 선보이는 다양한 수제 맥주.
드라이 게이트에서 선보이는 다양한 수제 맥주.
드라이 게이트 양조장 겸 펍에서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
드라이 게이트 양조장 겸 펍에서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

19세기 공업 도시에서 21세기 예술 도시로 거듭난 글래스고는 볼거리가 무척 많았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병따개 겸용 펜으로 메모를 할 때 마다 마트에 두고 온 맥주가 자꾸만 떠올랐다. 가이드가 점심을 먹자며 ‘드라이 게이트(Dry Gate)’로 일행을 이끌었다. 오래된 공장 건물 같은데, 여기가 레스토랑이라고? 어라. 실눈을 뜨며 바라본 드라이 게이트입구에 양조장이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두려움 없이 양조하라’는 신조로 실험 정신 가득한 수제 맥주를 만드는 양조장 겸 펍 이었다. 키위 맥주, 아웃 스페이스 애플 에일, 글루텐 프리 밀 맥주 등 이름부터 남달랐다. 그 중에 애플 에일은 사과 향과 홉 향의 균형이 잘 어우러져 매력적인 맛이었다. 무엇보다 내부의 보틀 숍이 반가웠다. 드라이게이트 양조장 맥주는 물론 세계 각국의 수제 맥주를 팔았다. 이때다 하는 맘으로 맥주를 샀다.
 
드라이 게이트에서 맛본 맥주와 점심 식사.

드라이 게이트에서 맛본 맥주와 점심 식사.


그날 밤, 마침 내 병따개 겸용 볼펜으로 맥주를 땄다. 유리잔에 콸콸 따르는 소리가 그 어떤 음악보다 경쾌했다. 끝내 테넌츠 스카치 에일은 맛보지 못했지만, 여행의 끝에서 만난 드라이 게이트의 에플 에일 한 잔은 나를 위한 선물 같았다. 다시 스코틀랜드에 오면 더 많은 양조장의 맥주를 마셔보리라 다짐하며 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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