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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32. 허물벗기

중앙일보 2016.11.24 00:01
“월요일엔 목사를 만나고, 화요일엔 사업가... 수요일엔 화가를 만나는.. 사생활이 복잡한 여자이야기를 할게...”
 
작정하고 말을 시작 했을 때 순간 하얘졌던 쥬디의 얼굴은 내가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원래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쥬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간이 내 말의 호흡에 맞춰 맥주 캔을 열고 유리잔에 거품 가득 술을 따랐을 뿐이었다.
 
앞에 술이 따라져 있었지만 처음 한 캔 이후 나는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털어놓는 이야기들이 행여 술기운을 빌어 쏟아내는 푸념이나 고백으로 비쳐지는 게 싫어서였다.
 
쥬디는 무언가 물어 볼 말이 있는 듯 번뜩이는 눈빛으로 잠시 내 말을 멈추게 했지만 결국 끝까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내 눈빛이 그를 향해 건너갔으나 쥬디는 묵묵히 맥주만 들이켰다.

그는 판단이 빠른데다 정확한 결정을 내리는 스타일이다. 내 이야기의 허술한 구석쯤에서 분명 반론을 제기할 것 같아 염려가 됐지만 그는 내가 말하는 동안 한 번씩 나를 응시하는 외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쥬디는 새 유리잔에 맥주를 채워 내게 건넸다. 셔츠에 팬츠만 입은 모습이었지만 잔을 내미느라 불빛에 반사된 금테 안경은 늘 그랬듯 매섭고 날카롭게 반짝 빛을 냈다.
 
“이제 우리 사이를 정리하자는 의미인가?”
 
나는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스로 상처입지 않기 위해 결국 다른 사람을 상처 입게 했던 것에 대한 속죄 같은 것이었다.
 
파리에서 아트와 대화하면서 그동안 만나왔던 사람들에게 몹시 미안했었다. 내 상처만 생각하느라 정작 상대의 마음에 대해 무심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런 생각 이후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사람이 쥬디였고 또한 쥬디는 지금 나를 전적으로 돕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로 인해 쥬디가 이 순간 나를 떠난다 해도 나는 우선 정직을 선택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일 뿐이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도 전처럼 그렇게 만날 수 있을까...?”
 
내 물음에 그의 답이 거침없이 날아왔다.
 
“이제까지 하지 않던 이야기를 내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나?”
 
“예상치 않게 영상에서 한정현이 말했고....”
 
“한정현이 말하기 전에 네가 먼저 말하려고 했어.”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쥬디를 쳐다보았다. 쥬디의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게 있었어...”
 
쥬디는 내 답을 예상했다는 듯이 이맛살을 살짝 들어 올리며 눈을 크게 떴다.
 
“상대가 받을 상처?”
 
“...그래.. 그 생각을 못했었어...”
 
내내 굳어있던 쥬디의 입술이 살짝 옆으로 벌어졌다.
 
“너한테만 7분의 1이었을 것이고 상대는 1분의 1... 결국 전체였을 테니까.”
 
쥬디는 남의 얘기를 하듯 담담하고 초연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담배 갑을 꺼내 한 개비씩 테이블에 담배를 늘어놓았다. 무언가 하나를 골라야하는 것처럼 주르륵 늘어놓은 그것을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 나한테 화내도 돼....”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흡사 날카로운 칼과 같은 쥬디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침묵으로 일관하기 보단 그가 어떤 반응이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애쓴다 해도 전처럼 관계가 유지되는 건 힘들 일이었다. 그럴수록 대가를 치르고 싶었다. 내 마음이 빨리 편해지는 건 그 방법 밖에 없었다.
 
“내가 화를 내면 네가 좀 편해질 거 같아?”
 
여전히 테이블에 늘어놓은 담배에 눈을 둔 채였다.
 
“담배를 보고 있지만 마음은 내 머리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아... ”
 
“머리 아니고 가슴, 가슴이 다 들여다보여.”
 
쥬디는 그 중에 한 개비를 골라 들고는 필터 부분을 손가락으로 툭툭 튕겼다.
 
“화 내도 돼...내가 선배한테 정직하지 않은 거니까... 선배만이 아니라 다른 남자도... ”
 
내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쥬디가 말을 차고 들어왔다.
 
“그래.. 나는 장현수가 아니니까...”
 
쥬디가 벌떡 일어섰다. 그가 만일 그대로 내 집에서 나가버린다고 해도 나는 그를 붙들 수 없을 것이다.
 
쥬디는 거실 베란다 창을 활짝 열어젖히더니 쥐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가 내 뿜은 연기는 어둑한 하늘을 향해 길게 춤을 추었다.
 
“미안해, 선배... ”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그 말은 도무지 소리가 되어 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동안의 모든 상황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용서 받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지 않고 내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담배를 끄고도 한참 창밖을 내다보며 서 있던 그는 천천히 다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하나 물어봐도 되니?”
 
나는 대답 대신 잔에 가득 차 있던 맥주를 들이켰다. 지금 쥬디가 내게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감수해만 할 것이었다.
중간 중간 내 말의 흐름이 끊어질 때 마다 응시하는 것으로 삼키고 말았던 많은 할 말들이 이제 쏟아져 나올 모양이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거나 사랑한다는 건 말야.. 상대의 마음을 읽는 일이야. 그래서 상대의 생각으로 사물을 보고 상대의 마음으로 뭔가를 한다는 거지.”
 
쥬디의 목소리가 약간 떨고 있었다. 쥬디는 좀처럼 자신의 말에 감정을 싣지 않는 사람이었다. 처음이었다.
 
“선배... 미안해....”
 
이제 겨우 말이 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소리가 되어 공기 속으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반미주는... 학생 때부터 알았으니까... 반미주는 좋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야. 영리하고 영민해... 그런데 그런 네가... 그걸 몰랐을까? ”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비수처럼 나를 향해 날아왔다.
그는 물어볼게 있다고 했지만 그 건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너는....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거야. 네 이기심 때문에... 상대방의 상처가 있을 줄 몰랐던 게 아니라 알면서도 안중에 없었던 거지.”
 
그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쥬디는 항상 옳았으니까..
나는 지독하게 이기적인데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라 단지 나 자신에만 집중해 있었던 거다..
 
“네가 네 삶을 사랑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이었다면 너를 좋아할 수 없었을 거야. 너는 자존감이 높고 진정으로 너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었어. 즉흥적인 기분에 자신을 맡기고 즐기는, 그러고도 스스로를 용서하는 그런 여자라고 생각한 적 없어. 그리고 너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그래서.... ”
 
쥬디는 여기서 말을 끊고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것 중 한 개비를 또 골라내었다. 이번엔 소파에 앉은 채 그것에 불을 붙이곤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연기는 천장을 한 바퀴 돌다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너한테 더 실망이 돼... ”
 
남의 상처 따위는 안중에 없는 자신만을 아끼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라고... 실망했다고 나를 질책하는 쥬디가 고마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너를 이해해... 혹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쯤으로 내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나는 걷어 올린 종아리를 내리지 못하고, 언제 날아올지 모를 회초리에 종아리를 내 놓곤 내내 마음 졸이고 있을 것이었다.
 
종아리를 가로지르는 빨간 회초리 자국이 선명하도록 해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죽어도 너를 용서할 수 없다고, 너를 만난 건 내 생에 최악이었다고 드라마 치정극에서나 들을 수 있는 대사들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 쥬디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이라면 다 감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쥬디는 핏기없는 약간은 긴장된 표정으로 한참 나를 쳐다보았다. 미안했지만 정말 더 이상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 나머지 여섯 명인가? 아니 장현수는 없으니.... 다섯이군. 근데 그 사람들한테도 이렇게 다 이야기 한 건가?”
 
“아니, 선배가 처음이야.”
 
“그렇군.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한텐 이런 식으론 하지 말지...”
 
“....”
 
“그 사람들의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의 것에 집중했다는 걸 반성하는 건 좋아. 그렇지만 그 고백에 몰랐던 자신의 상처를 뒤 늦게 깨닫고 아프게 되는 건.... 별개의 문제 같아. 결국 아픔을 만들어 주는 것 아닐까.”
 
“선배 말이 맞지만.. 그렇다고 끝까지 속이면서 관계를 끝낼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끝낸다고? 그럼 아버지로부터 얻게 된 트라우마는 극복했다는 말인가? 상대방의 상처를 깨달으면서? 그건 아니잖아... 근본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 것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야. ”
 
“ .... ”
 
“내게 그랬듯 다른 사람들에게도 분명 충격일거야...”
 
쥬디는 전화를 걸어 대리기사를 부르고는 곧장 수트를 챙겨 입었다.
 
“장현수에 관한 해법은 같이 찾기로 하자. 처음부터 같이 시작한 건데다 또 내가 돕기로 약속한 거니까 그건 같이 하기로 해. ”
 
급히 노트북 가방을 챙겨들고 나가는 쥬디를 내가 불러 세웠다.
 
“마음 내키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아도 돼...”
 
“넌 기자 정신이라는 걸 잘 모르는 거지? 기자 정신이랑 기사도 정신은 좀 다르지만 내겐 둘 다 있어. 그러니 다른 걱정 말고... 네가 파기하지 않는 한 우리가 알고 있는 장현수에 대한 이야기는 엠바고에 걸려있는 걸로. 더 질문없지?”
 
“미안해 선배. 하지만 나 선배 좋아했어. 많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였지만 선배에 대한 마음이 거짓이었다는 건 절대 아니야.”
 
“그래 그럴 거라 생각해. 네가 장현수를 생각하는 걸 보면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그렇지만 나는 장현수가 아니니까... 암튼 그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 더 하고 싶지 않아.”
 
문을 나가던 쥬디는 다시 돌아서 당부했다. 현관 보안장치 하는 거 철저하게 해. 아까 복사한 거 웹에도 몇 군데 보관해.. 이전까지 쓰던 패스워드는 가급적 예상할 수 없는 걸로 바꾸고... 공인인증서 같은 것도 다시 재발급 받고... 귀찮아도 그런 장치라도 해 놔야 네가 너를 지킬 수 있어.”
 
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현관문이 닫혔다. 조심히 다가가 미경이 현관 앞에 메모해 놓은 대로 따라서 락을 걸었다.
 
에프를 죽일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이런 기능적인 장치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었다. 그들은 마음만 먹는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웹 공간이 있는 곳마다 찾아서 복사본을 저장해두었다. 그리고 내가 묵었던 파리 호텔에 전화했다. 내 방에 있는 짐을 모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짐을 받는 곳으론 회사주소를 남겼다. 처음엔 엄마 집을 생각했지만 가장 안전한 곳이 회사 같았다.
 
아트는 파리에서 돌아왔는지... 한번 쯤 어디선가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를 찾으려 하기 전에 나타날 거라는 묘한 말을 남겨놓고 그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나는 아트의 조언이 필요하다....
 
 
 
다음날 아침, 잠을 깼으나 짧은 일정동안 파리를 오가느라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미영에게만 알리고 아직 아무에게도 돌아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국회로 향했다. 아트부터 만나야 했다. 국회의장실에 있다고는 했지만 이름을 알 수 없으니 찾을 길이 묘연한데다 파리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컸다.
 
의원실로 전화했더니 김천수는 부재중이었다. 그를 만나야 아트를 수소문 할 수 있을 텐데 그도 없었다. 핸드폰 번호를 모르니 국회도서관 카페에서 손님이 기다린다는 말만 전해 달라 남겨 놓고 도서관 카페로 갔다.
 
오전이라 그런지 카페는 한산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 앞의 자리가 비어있어 또 그곳을 찾아 앉았다. 이미 겨울로 들어서서 인지 따뜻한 커피가 위로처럼 느껴 졌다.
 
테이블에 놓인 국회 도서관지를 보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잠시 졸았던 모양이었다. 깜빡 눈을 떴을 때 다리가 기다란 남자가 앞에 서 있었다.
 
“아...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도 하늘에서 내려온 금방 내려온 천사모습입니다.. ”
 
김천수였다.
 
“아.. 안녕하세요? 잠시 졸았네요...”
 
“이렇게 천사 같은 모습으로 졸아주신다면 우리 같은 미물들은 그저 황송할 뿐입니다.”
 
“왜 그렇게 서 계세요?”
 
“혹시....?”
 
“...네?”
 
“카페로 호출하신 분이 미주씨?”
 
“아.. 죄송해요. 제 이름을 남기지 않았네요. 맞아요. 어서 앉으세요.”
 
“아, 미주씨가 저를 다 찾아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그것도 우리 처음 만난 데서... 딱 두 달 만이네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
 
앞의 자리에 앉는 그는 여전히 건들거렸지만 처음 느꼈던 것처럼 불량해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로 미주씨가 저를... 저는 월말 쯤 휴가 내서 마음먹고 연락을 한 번 드려야하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조금 덜 바빠서요...”
 
“다른 게 아니라 지난번에 만났던 아트란 분......”
 
“누구요...아트....?”
 
“국회의사당 식당에서 식사 중에 뵈었던 분 있잖아요.. 고등학교 동기라고 하셨던가? 아트라는 분...의장실에 계신다고 하던...”
 
“아트...? 누구지? 이름이 아트였어요?”
 
“그날.....”
 
대답을 제대로 건네기 전에 내 핸드폰에서 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반미주씨 핸드폰입니까?”
 
딱딱하고 건조한 청년의 목소리였다.
 
“네... 누구신가요?”
 
“잠시만 대표님 바꿔드리겠습니다....”
 
무슨 대표인지 말도 하지 않은 채 잠깐 시간이 흘렀다.
 
“나 한정현이오....”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지만 이미 익숙한 묵직하고 중후한 공명을 가진 어떤 음성이 날아들었다.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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