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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 고석희 기자의 블링블링] '심슨 가족'은 신내림을 받았나

중앙일보 2016.11.21 14:30
지난 11월 8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70) 공화당 후보가 45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 결과로 미국 사회 일부는 물론, 전 세계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이는 할리우드도 마찬가지. 일례로 이탈리아 출신 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고국으로의 이민을 진지하게 고려 중”이라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이미 지난 7월 트럼프 당선을 예견한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의 글 ‘트럼프가 승리할 다섯 가지 이유’(허핑턴 포스트)가 화제를 모았지만, 이보다 무려 16년 앞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언급한 작품이 있다. 1989년 첫 방영 이후 30년 가까이 전 세계 시청자에게 사랑받고 있는 TV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원제 The Simpsons, FOX, 이하 ‘심슨’). 2000년 3월 방영된 ‘심슨’ 11시즌 17화 ‘미래로 간 바트(Bart to the Future)’ 에피소드에서는, 2030년 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이 된 심슨 가족의 딸 리사(이어들리 스미스·목소리 출연)가 전임 대통령 트럼프를 회상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여기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파산시킨 역대 최악의 리더로 묘사됐다. 물론 이러한 설정이 ‘맨땅’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1999년부터 트럼프는 대선 도전 의욕을 보여 왔고, ‘심슨’ 제작진이 시간 여행 설정을 통해 이를 풍자했던 것. ‘심슨’의 창작자 맷 그레이닝은, 미국 대선을 한 달 앞둔 지난 10월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2000년에 ‘트럼프 대통령’ 설정을 넣은 이유는, 그것이 당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황당한 일이었기 때문”이라 말했다.

이전에도 ‘심슨’은 미래 사건들을 여러 차례 예견했다.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 확산은 1997년 에피소드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2012년 물리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힉스 입자 발견은 그보다 14년 앞선 1998년 에피소드에 유사한 공식이 등장했다.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9·11 테러 역시 예고됐다. 이 사건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뉴욕’ ‘9달러’라는 글자, 숫자 11처럼 보이는 ‘쌍둥이 빌딩’)가 사건 발생 불과 6개월 전 극 중 잡지 표지로 등장했다. 만화 속 사건이 예언처럼 현실에 실제로 일어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심슨’이 오랫동안 사랑받은 까닭은, 신랄한 풍자 안에 날카로운 통찰과 상상력이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새삼 예술이 지닌 힘에 탄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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