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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인생 35년 60대 여성의 사기 행각에 이천 시골마을 '발칵'

중앙일보 2016.11.21 12:04
“○○할아버님, 애들 유학비가 모자라네요.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지난 7월부터 3개월간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단천리 주민 문모(64·여)씨는 이웃에 사는 A씨(80)에게서 수 차례에 걸쳐 8500만원을 빌렸다. A씨 자신을 친아버지처럼 모시면서 고추농사 등 마을의 궂은 일도 도맡아시피 도와주는 문씨의 부탁이라 흔쾌히 받아들였다. 현금이 없던 A씨는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아 문씨 자녀 유학비와 생활비 등을 부탁할 때마다 마련해줬다.

문씨는 또 다른 이웃 B씨(53·여)에게서도 수 차례에 걸쳐 9800만원을 빌렸다. B씨는 수중에 현금이 없으면 신용카드로 돈을 찾아 주기도 했다. 문씨는 순직한 군인(중령)의 아내로, 착실한 교회 신도로 마을에 소문 나 있었다. 한 달에 받는 연금만 490만원으로 알려졌다. 문씨와 함께 대전 현충원에 가 문씨 남편의 묘소를 참배하고 온 마을 주민도 있었다. 문씨에게 돈을 빌려준 마을 주민은 A씨 등을 포함해 모두 8명, 금액은 4억원에 달한다. 보증금 100만원·월 25만원의 월세를 살던 문씨를 마을주민들은 “소박한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달 19일 문씨가 사라지면서 그의 35년 ‘가짜 인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문씨의 원래 이름은 ‘전○○’였다. 경찰 조사 결과 전씨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전북 부안군 부안읍에서도 비슷한 수법으로 5명에게서 2억3000만원을 빌린 뒤 도주한 것으로 확인됐다. 부안에서는 전씨가 아닌 임씨로 주로 생활했다고 한다.

1980년 강원 원주에서 살던 전씨는 가출 후 남편과 이혼했다. 일정한 거주지가 없던 전씨의 주민등록은 말소됐고, 우연히 습득한 ‘임○○’, ‘문○○’씨의 주민등록증을 사용해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살아온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행정·의료기관 등에 이들 명의를 사용하지 않아 명의도용이 드러나지 않았다.

A씨로부터 1000만원을 추가로 빌려 도피자금을 마련한 전씨는 최근 강원도 원주의 한 원룸에서 숨어 지내다 경기 이천경찰서 수사관들에게 사기 혐의로 긴급체포돼 구속됐다. 전씨는 경찰조사에서 “채무를 돌려막다 보니 돈을 계속 빌리게 됐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전씨의 정확한 범행동기와 돈의 사용처, 여죄 등을 확인 중이다. 일부 주민들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제대로 피해 진술을 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라고 경찰은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80대 집주인을 어머니처럼 모시는 등의 착한 행동을 보이면서 마을 주민들로부터 믿음을 샀다”며 “지방에서도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철저히 신분을 속여 경찰 추적을 피해왔다”고 말했다.

이천=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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