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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트럼프 보호무역주의, 45년 전 ‘닉슨쇼크’ 데자뷔

중앙일보 2016.11.21 01:08 종합 20면 지면보기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며칠 뒤, 국제금융통으로 잘 알려진 경제부처 전직 고위 관료는 평소 친분이 깊던 뉴욕 월가의 경제 전문가로부터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트럼프를 잘 안다는 월가의 지인은 “트럼프가 닉슨 방식을 따라 할 가능성이 크다”며 “트럼프의 무기는 ‘환율과 세금(관세)’인데 최악의 경우 닉슨쇼크의 데자뷔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리처드 닉슨(사진) 대통령의 1971년 ‘닉슨쇼크’는 금태환제 중단이 그 핵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닉슨쇼크에는 수입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중앙포토]

리처드 닉슨(사진) 대통령의 1971년 ‘닉슨쇼크’는 금태환제 중단이 그 핵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닉슨쇼크에는 수입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중앙포토]

닉슨쇼크(Nixon Shock)는 1971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발표한 경제정책으로 세계 경제가 받은 충격을 뜻한다. 경제사에 쇼크는 늘 있었지만 트럼프의 당선으로 무려 45년 전 닉슨쇼크가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60년대 분열된 미국 사회를 ‘종말론적’ 모습으로 표현하며 대중의 불안 심리를 끌어내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의 캐릭터와 그가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용한 보호주의적 경제기조가 지금의 트럼프와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관세·환율 무기로 제조업 살리기
트럼프 공약과 닉슨 정책 판박이
한국, 71년 성장률 단박에 반토막
2년 뒤 오일쇼크까지 겹쳐 큰 충격

71년 8월 15일(현지시간), 닉슨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던 카우보이 드라마 ‘보난자(Bonanza)’ 정규 방송을 중단시키고 긴급성명을 통해 ‘신(新)경제정책’을 발표했다. 금과 달러의 교환을 중단하고 모든 수입품에 10%의 관세(수입과징금)를 매기는 것이 골자였다. 닉슨의 발표 전까지 국제통화 시장은 ‘브레턴우즈 체제’ 아래 있었다. 브레턴우즈란 순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키고 다른 나라의 통화는 달러에 일정한 비율로 고정시키는 달러 중심 금본위제 체제다. 당시 미국은 세계 금 보유량의 80%를 독식하고 있었기에 이런 시스템이 가능했다.
그런데 50~60년대를 거치며 미국 내 상황이 변했다. 베트남전쟁에 너무 많은 달러를 썼고 국내 복지비용 지출도 만만치 않았다. 필요한 달러를 마구 찍어 내다 보니 달러 가치는 떨어지고 금 보유량은 줄어들었다. 여기에 독일·일본의 수출 경쟁력이 높아지며 상대적으로 무역적자까지 심해져 수년 만에 처음으로 국제수지(무역수지를 포함한 경상수지+자본수지)가 적자를 기록했다.
이에 닉슨은 ‘환율과 관세’라는 칼을 빼 들었다. 금본위제를 폐지해 ‘강달러’에서 ‘약달러’로 갈 수 있음을 선언하고 미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제조업을 살리겠다는 계획이었다. 여기에 나라를 막론하고 모든 수입 제품에 10%의 관세까지 매겨 외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 약화를 유도했다. 전형적인 보호무역주의이자 트럼프 경제공약과도 유사하다. 트럼프는 기본적으로 미국 기업에 도움이 되는 약달러를 선호한다.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고 중국산 수입품에 45%의 관세 부과와 멕시코산 수입품에 35%의 관세 부과를 공약했다. 일본에 대해선 아베노믹스를 통해 엔화 가치가 40%나 절하되도록 조작했다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트럼프는 당선 뒤에도 주요 자유무역협정(FTA)의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다. 한·미 FTA도 재협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닉슨쇼크에 버금가는 ‘트럼프쇼크’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국제 경제 흐름을 바꿔놓은 닉슨쇼크의 그림자가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이면에 어른거린다. [중앙포토]

국제 경제 흐름을 바꿔놓은 닉슨쇼크의 그림자가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이면에 어른거린다. [중앙포토]

당시 닉슨은 무역흑자를 기록하던 일본과 독일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트럼프 정부 역시 미국이 무역적자를 많이 보는 국가를 겨냥할 수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이 가장 많은 무역적자를 보는 나라는 중국으로 2015년 적자 규모는 3660억 달러(약 431조원) 다. 한국은 280억 달러로 5위다.

닉슨의 신경제정책은 엄청난 연쇄작용을 낳았다. 닉슨 발표 10일 만에 일본은 달러화에 대한 엔화의 변동 환율을 허용한다고 발표한다. 그 즉시 달러화 대비 엔화 가치가 7% 급등했고 여기에 10% 관세까지 더해져 미국으로 수출되는 일본 제품의 가격은 삽시간에 17%나 오르게 됐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만 해도 71년 3분기에 전년 대비 11.3%였던 경제성장률이 그해 4분기엔 6%로 반 토막이 났다. 막대한 부채를 껴안고 있었던 국내 기업들은 대외 충격으로 휘청거렸고 급기야 정부는 금리를 내리고 기업과 사채권자의 채권·채무관계를 전면 무효화하는 ‘8·3 긴급경제조치’를 단행했다.
더욱이 닉슨의 발표는 오일쇼크의 도화선이 됐다. 금과 달러 간 연결고리가 끊어지자 달러 가치는 떨어지고 금값은 치솟기 시작했다. 산유국들은 원유를 팔아 달러를 벌어 봤자 예전만큼 충분한 금을 살 수 없게 되자 원유 가격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73년 10월 16일 원유 고시 가격을 17% 인상한 것은 사실상 달러 가치의 하락분만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오일쇼크의 직접적 원인은 중동 국가 간 전쟁이지만 닉슨의 발표가 쇼크를 가능하게 했던 실질적 배경이 된 것이다. 원유 가격이 오르면 모든 물가가 오른다. 물가가 오르니 소비는 줄어들었다. 1차 오일쇼크가 터진 73년부터 세계 경제는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경기는 침체됐는데 물가만 계속 오르는 불황, 즉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stagnation+inflation)이 이때 악명을 떨쳤다.

이상재 유진투자증권 연구위원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필연적으로 통상마찰과 환율전쟁을 불러 결국 전 세계 교역에 위협 요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계 교역량 둔화는 세계 성장률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 지난해 세계 교역액은 12.2% 줄어 금융위기에 따른 2009년 급감(-23%)에 이어 6년 만에 최대 폭을 기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그 원인으로 보호무역주의와 반(反)세계화를 거론했다. 트럼프 정부가 보호무역주의와 고립주의를 지속할 경우 세계 교역량이 줄고 세계적으로 저성장 기조가 심화되는 국면을 맞을 수도 있 다.

특히 한국은 일명 ‘최순실 정국’을 맞고 있다. 과거 닉슨 발표 이듬해에도 10월 유신으로 헌법의 효력이 정지되고 국내 정치와 경제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당시 한국은 국제수지·물가·고용·소비·생산 등 경제 전반에 걸쳐 전례 없는 위기를 맞게 됐다. 이후 78년 이란이 미국에 원유 수출을 금지하면서 원유 가격은 다시 한번 폭등해 세계 경제에 충격을 줬다. 결국 미국은 달러 가치 추락과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20% 가까이 올리고 기업 규제 철폐, 감세정책을 펴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 세계적인 ‘소비강국’으로 호황기를 누리게 된다.

물론 45년 전과 지금은 세계 경제가 매우 다르다. 트럼프가 환율조작국으로 지명하겠다고 공언한 중국은 미국과 함께 주요 2개국(G2)으로 성장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중국산 수입품에 45%의 관세를 부과할 경우 월마트 등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상품 가격이 올라 미국 서민들의 피해가 불가피하다”며 “자국 우선주의 확대는 아시아 지역 공급 위축을 유발해 특히 미국 노동자의 충격이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통상마찰과 환율전쟁은 미국 노동자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어 섣불리 공약을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란 얘기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트럼프가 한·미 FTA나 중국과의 관계를 깰 수는 없고 결국 주고받는 협상으로 갈 것”이라며 “한국 입장에선 농축산물이나 서비스 부문이 약한 고리가 될 수 있겠지만 협상에 시간이 걸리는 만큼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는 기업가 성격이 강한 만큼 수세적으로 가면 불리하고 오히려 내줄 것은 내주고 챙길 것은 챙기겠다는 식으로 명확히 자세를 잡고 ‘윈-윈 상황’을 만들어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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