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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한은 1조5000억 처방전 ‘트럼프 발작’ 잠재울까

중앙일보 2016.11.21 01:00 경제 1면 지면보기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트럼프 발작(tantrum)’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국은행이 행동대장을 자처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시장금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앙은행이 국고채 매입이라는 강수로 맞섰다. 시장에서는 한은이 “언제라도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신호를 준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한은은 21일 1조5000억원어치의 국고채를 시장에서 경쟁입찰 방식으로 사들인다. 대상은 3년물, 5년물, 10년물, 20년물 등 6종목이다. 국고채를 시장에서 산다는 건 곧 국고채 가격 상승을, 다시 말해 국고채 금리 하락을 위한 조치다. 특정 물건을 대거 매입하면 가격이 오르는 것처럼 국고채 역시 대규모 매수세가 나타나면 가격이 오른다. 채권의 가격이 오른다는 건 곧 채권 금리가 낮아진다는 뜻이다.

미 금리, 가계부채 등 우려
국채 3년물 6일 새 22%↑

한은이 시중금리 급등세를 완화하기 위해 국고채를 매입한 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처음이다. 바꿔 말하면 현재 상황이 그때만큼 엄중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실제 트럼프의 미국 대선 승리라는 대이변이 발생한 이후 시중금리는 발작이 온 것처럼 폭발적으로 오르고 있다.
미국 대선 결과 발표일인 11월 9일 1.402%였던 국고채 3년물 금리는 17일 1.713%까지 올랐다. 상승률로 따지면 불과 6거래일 만에 22%나 폭등했다. 국고채 10년물 금리는 더 많이 올랐다. 11월 9일 1.671%에서 18일 2.132%로 27.6%나 상승했다. 여기에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17일(현지시간) “조속한 기준금리 인상이 필요하다”고 밝히면서 12월 미국 기준금리 인상은 기정사실이 되는 분위기다. 트럼프발 금리 폭등에 Fed가 기름을 끼얹는 상황이 됐다.

트럼프 발작으로 주요국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한국에 떨어진 불이 가장 뜨겁다. 가계부채가 1300조원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금리 폭등은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이미 은행의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오름세로 돌아선 지 오래다. 18일 현재 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의 변동금리 주담대 상품 금리는 2.86~4.46%로 지난달 말보다 0.06~0.26%포인트 상승했다. 대출금 이자 부담이 적정 수준 이상으로 높아지면 소비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0일 발표한 ‘가계부채가 소비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최근까지는 가계부채 증가가 소비 증가로 이어졌지만 올 하반기부터는 소비를 줄이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며 “내년에는 가계부채로 인해 소비증가율이 0.63%포인트 낮아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현재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건설 및 부동산 경기의 침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 경우 내년 경제성장률이 2% 초반은 물론 1%대로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금리 인상과 함께 도래한 원화가치 폭락은 외국인 투자가의 한국 시장 이탈을 부채질한다.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는 11월 8일 1135원에서 18일 1183.2원으로 크게 하락한 상태다. 원화가치가 떨어질수록 손해를 보게 되는 외국인 투자가는 한국 증시에서 속속 자금을 빼고 있다. 11월 들어 코스피 시장에서 빠져나간 자금만 1조7000억원이 넘는다.
이주열

이주열

한은 입장에서는 수수방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실제 한은의 국고채 매입 방침이 알려진 18일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전날보다 0.033%포인트 하락한 1.736%로 마감하면서 트럼프 당선 이후 처음으로 하락 했다.

하지만 1조5000억원 정도의 채권 매입으로 추세를 전환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은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의미는 있지만 이 정도 매입 규모로는 시장의 흐름을 꺾기 힘들다”며 “필요하면 추가 국고채 매입을 통한 유동성 공급을 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한은이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조언도 나왔다. 김성태 한국개발연구원(KDI) 거시금융경제연구부장은 “아직 트럼프의 정책이 구체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은이 뉴스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한은은 정중동(靜中動)의 모습을 보이면서 정책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진석·이태경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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