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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으로] 880억 모은 청년희망펀드 유명무실…취업한 구직자 5%뿐

중앙일보 2016.11.19 01:00 종합 13면 지면보기
끊이지 않는 대기업 ‘준조세’

7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내부자들’에서 오연수(김홍파) 미래자동차 회장은 유력 대권후보인 장필우(이경영) 신정당 의원의 스폰서로 등장한다. 오 회장은 장 의원에게 대선 자금으로 300억원을 건넨다. 미래 권력에 대한 ‘보험’ 차원이다. 두 사람은 오 회장의 별장에서 술자리를 갖기에 앞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

기업 ‘괘씸죄’ 피하려 성의 표시
정권마다 반복된 노골적인 모금
정부 사업에 대기업 출연 관행


오 회장: 비정규직 관련 법안은 어케 됐노?

장 의원: 저 장필우가 목숨 걸고 막고 있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이번 회기에는 넝마가 될 겁니다.

오 회장: 그럼, 한잔 해뿌까?

정경유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영화가 최근 다시 주목받은 건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때문이다. 최씨가 설립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은 10대 대기업으로부터 설립 두 달 만에 774억원을 끌어 모았다. 대통령이 총수와 독대한 자리에서 출연을 압박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이를 계기로 역대 정권마다 반복된 ‘상납금’의 역사가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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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대기업 ‘팔 비틀기’ 역사는 뿌리가 깊다.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통치 자금을 조성한 것은 경제 성장이 급속도로 진행된 박정희(1917~79) 전 대통령 때부터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박 전 대통령은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지낸 김성곤(1913~75) 쌍용그룹 창업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이후락(1924~2009) 전 중앙정보부장 등을 내세워 정치자금을 조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로 외자 도입, 정부 발주 공사 과정에서 뒷돈을 챙기는 방식으로 통치 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두환(85) 전 대통령은 83년 아호인 일해(日海)를 딴 ‘일해재단’을 설립했다.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건 유족을 지원하고 스포츠 유망주를 육성한다는 목적을 앞세웠다. 84년 3월~87년 12월 대기업으로부터 598억5000만원을 거뒀다. 현대·대우·선경(SK의 전신)·국제가 모금에 참여했다.

전 전 대통령 재임 말기에 이르러서야 일해재단 모금이 강제성을 띠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대통령 퇴임 후를 대비해 세운 재단이란 지적도 나왔다. 88년 ‘5공 비리’ 청문회 때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었던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창업주는 일해재단 출연금에 대해 “1차는 날아갈 듯 냈다. 2차는 이치에 맞아 냈다. 3차는 편하게 살려고 냈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특별조사위원회는 끝내 정권이 기금 조성을 강요했다는 뚜렷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후 일해재단은 순수 연구기관인 세종연구소로 바뀌었다.
정권을 넘겨받은 노태우(84)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1988~93) 중 대기업으로부터 5000억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했다. 노 전 대통령은 비자금 조성 방법과 창구에 대해 2011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내가 재임할 때까지 여당 정치자금 대부분은 대기업으로부터 충당해 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기업인들 면담 신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면담이 끝날 때쯤 그들은 ‘통치자금에 써달라’며 봉투를 내밀었다. 5·6공화국 시절 정치자금 창구는 청와대로 단일화돼 있었다”고 썼다.

노 전 대통령은 95년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기소돼 97년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에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건희(74) 삼성그룹 회장, 김우중(80) 대우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 8명을 포함한 기업인 35명이 뇌물공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지만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무죄 선고를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97년 12월 사면됐다. 추징금은 2013년에서야 완납했다.
97년엔 국세청이 통치자금 ‘모금책’으로 나서기도 했다. 일명 ‘세풍(稅風)사건’이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이석희(70) 국세청 차장, 서상목(69) 전 한나라당 의원 등이 주축이 돼 삼성·현대 등 대기업 23곳에서 166억7000만원을 한나라당 대선자금으로 불법 모금했다. 이 전 차장은 논란이 커지자 미국으로 달아났다. 그의 도피로 이회창(81)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캠프로 흘러간 비자금 실체는 규명되지 않았다. 2003년 귀국한 이 전 차장은 2004년 대법원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차떼기’ 사건은 기업 정치 상납금 구설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캠프는 대기업에서 823억2000만원을 받았다. 2003년 검찰 수사에서 LG가 현금 150억원을 사과상자 수십 개에 담아 2.5t 트럭에 실은 뒤 경부고속도로 만남의광장에서 한나라당 캠프에 트럭째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은 340억원, 현대차는 109억원, SK는 100억원을 한나라당에 전달했다.

한나라당은 이 사건 때문에 ‘차떼기당’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차떼기란 배추·무를 심은 농민들이 돈이 급한 나머지 수확 전 밭을 통째로 중간 도매상에게 넘기는 ‘밭떼기’에서 나왔다. 이 사건으로 최돈웅(81) 당시 한나라당 재정위원장이 2004년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는 등 여야 정치인들이 줄줄이 처벌을 받았다. 당시 노무현(1946~2009) 전 대통령 후보 측도 삼성에서 30억원, SK에서 10억원, 한화에서 10억원 등 113억원의 대선자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차떼기 사건을 계기로 2004년 정치자금법이 개정됐다. 현 정치자금법은 개인이 아닌 법인·단체가 국회의원을 후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후원 액수도 국회의원 한 명당 연간 500만원으로 제한했다. 정권의 대선자금 모금이 사라진 대신 정부 사업에 대기업 출연을 받는 새 관행이 생긴 게 이때부터다.
이명박 정부 땐 ‘4대강’ ‘녹색성장’ 같은 정부 사업에 대기업을 대거 참여시켰다. 7000억원대 동반성장 기금 재원도 기업에서 모금했다. 서민금융 상품인 ‘미소금융’도 마찬가지다. 삼성이 3000억원, 현대차·SK·LG가 각각 2000억원, 롯데·포스코가 각각 500억원 등 수년에 걸쳐 총 1조원을 출연하기로 약속했다. 2009년 국정감사에서 홍영표(59) 당시 민주당 의원은 미소금융에 대해 “기업이 공감하는 것과 정부가 목표액을 제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라며 “관치금융의 전형”이라고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선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조성한 ‘청년희망펀드’에 대기업을 중심으로 880억원을 모금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9월 ‘1호 기부자’로 2000만원을 내면서 시작됐다. 와병 중인 이건희 회장이 사재 200억원을 ‘포괄적 위임’ 형태로 기부하고, 그룹 임원들이 50억원을 더해 삼성그룹에서만 250억원을 내놨다. 현대차(200억원), SK·LG·롯데(각각 100억원), GS(50억원), 포스코(40억원), 한화(40억원) 등이 기업 규모에 맞게 기금을 냈다. 하지만 대통령의 한마디에서 시작해 뚜렷한 사업 계획 없이 재단을 급조한 결과 사업 성과가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용득(63)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재단 지원을 받은 청년 구직자는 1만1305명인데 이 중 취업으로 연결된 구직자는 561명(5%)에 그쳤다. 기업 팔을 비틀고 국민을 호도해 모은 기부금을 청년 취업에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의 핵심 사업 중 하나인 ‘창조경제’와 관련해 지역별로 만들어진 창조경제혁신센터에도 대기업 15곳이 한 곳씩 맡아 수백억~수천억원씩 출연했다.

 
클린턴재단·부시재단…미국도 대통령 재단 논란
도널드 트럼프(70)가 대선 승리를 거머쥔 미국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전·현직 대통령을 위해 만든 재단을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미국엔 ‘레이건 재단’ ‘조지 W 부시 재단’ ‘빌·힐러리, 그리고 첼시 클린턴 재단’ 같은 대통령 재단이 있다.

1950년대 이후 생기기 시작한 미국 대통령 재단은 재임 기간 중의 방대한 기록물을 보관·관리하는 대통령 도서관을 운영하기 위해 만들었다. 연방정부가 도서관 운영 경비를 지원하지만, 도서관 건립은 민간에서 기금을 모아 보탰다.

하지만 재단 성격이 90년대 이후 크게 바뀌었다. 퇴임 대통령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하는 쪽이다. 조지 W 부시 재단이나 클린턴 재단은 규모는 물론 역할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부시 재단은 2014년 기준 기부금과 자체 사업 수입이 6700만 달러(약 800억원)에 이른다. 자산 규모도 4억 달러(약 4600억원)가 넘는다. 클린턴 재단은 연 1억7000만 달러(약 2000억원) 이상을 벌어들인다.

최근엔 거액 기부자에 대한 혜택을 뜻하는 ‘퀴드 프로 쿼(Quid Pro Quo)’에 대한 우려가 높다. 빌 클린턴(70)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 거액을 자신의 재단에 기부한 지인의 전 남편을 사면해 줘 퀴드 프로 쿼란 지적을 받았다. 지난해 말까지 399만 달러(약 50억원)를 모금한 오바마 재단을 둘러싸고도 오바마 대통령이 거액 기부자를 사적으로 백악관에 초청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 때문에 국회에서 거액 기부자 명단을 공개하는 법안 발의가 추진되고 있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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