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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스플릿’ 이다윗. 외골수 볼링 천재 캐릭터에 공기처럼 녹아들었다

중앙일보 2016.11.18 00:01
도박 볼링을 다룬 ‘스플릿’(11월 9일 개봉, 최국희 감독)에서 지적 장애를 가진 청년 영훈을 연기한 이다윗(22). 그를 두고 누군가는 “훌륭한 신예”라 했다. 그러나 이다윗은 신인 배우가 아니다. 아홉 살에 TV 드라마 ‘무인시대’(2003~2004, KBS1)로 데뷔한 그는, ‘시’(2010, 이창동 감독) ‘고지전’(2011, 장훈 감독) 등 총 35편의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한 13년 차 배우다. ‘신예’라는 표현에서 역설적으로 그의 중요한 연기 특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어떤 작품이든 공기처럼 완전히 녹아드는 배우. 이다윗은 그토록 자연스럽게 연기해 왔다. ‘스플릿’은 그의 필모그래피에 전환점이 될 영화다. 그동안 쌓은 연기 내공을 바탕으로, 자폐 성향을 가진 볼링 천재 역을 설득력 있게 소화해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다윗에게 ‘스플릿’은 “섣불리 출연을 결정하기도, 영훈의 작은 눈짓 하나를 연기하기도 어려운 작품”이었다. 이다윗을 만나 그가 영훈이 되기까지의 긴 이야기를 들었다.
스타일리스트 홍은화, 김영선 헤어 진우(엔끌로에) 메이크업 은지(엔끌로에)

스타일리스트 홍은화, 김영선 헤어 진우(엔끌로에) 메이크업 은지(엔끌로에)

지적 장애를 가진 영화 속 캐릭터는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곤 했다. ‘말아톤’(2005, 정윤철 감독)의 초원(조승우), ‘7번방의 선물’(2013, 이환경 감독)의 용구(류승룡)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듯이. 그런 만큼 ‘스플릿’의 영훈은 이다윗에게 부담스러운 역할이었다. “도전, 그 자체였죠. 시나리오에는 영훈에 관한 지문이 많지 않았어요. 그건 ‘(캐릭터에 대해) 전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이어서 출연을 고사할까 했죠.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로서 역할을 가릴 처지인가, 지금은 어떤 캐릭터든 흡수해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때야.’ 그래서 출연을 결심했어요.” 지적 장애에 관한 사전 지식이 전무했던 그는 공부하기 시작했다. 관련 서적을 필사하며 읽었고, 지적 장애인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해 심리상담사도 만났다. “‘말아톤’을 참고하려 했는데, 최국희 감독님이 ‘영훈은 초원보다 훨씬 비장애인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지적 장애에도 정도의 차이가 다양하더라고요. 영훈은 혼자 생활하기는 버겁지만, 타인과 소통은 가능하죠. 이를 관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게 관건이었어요.” 촬영을 준비하는 5개월 동안, 이다윗은 실제 지적 장애인을 만나지 않았다. “약속까지 잡았는데 도저히 못 만나겠더라고요. 예전부터 장애인에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고, 단지 연기를 잘하려고 그분들을 만나는 일은 할 수 없었어요.” 그는 영훈이 “단순히 연민을 자극하는 인물로 소비되지 않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극 중 영훈 주변에는 나쁜 사람들이 더 많아 마음이 아팠죠. 자기를 이용하는 줄 알면서도 좀처럼 내색하지 않는 영훈을 잘 담아내고 싶었어요.”
시

고지전

고지전

스플릿

스플릿

흥미로운 것은, 극 중 영훈의 빼어난 볼링 실력. “저도 처음에는 의아했어요. 실제로 최 감독님이 볼링장에서 영훈 같은 분을 만나셨대요. 그분에게 영감을 받아 이 영화가 시작된 거죠.” 극 중 영훈은 독특한 포즈로 강력한 ‘스피너 볼(Spinner Ball·공이 중심축을 따라 돌면서 빠르게 전진하는 구질, ‘팽이 볼’이라고도 불린다)’을 구사한다. 엄청난 파괴력으로 통쾌하게 스트라이크 치는 영훈의 모습을 보는 재미도 크다. 볼링할 때 원래 왼손을 사용하던 이다윗은, 이 영화를 위해 오른손으로 바꿔 훈련했다고. 그는 “독특한 볼링 포즈를 만드느라 평균 점수(에버리지)는 많이 올리지 못했다”며 웃었다. “최고 150까지 나왔어요. 훈련한 것 치곤 낮은 점수죠. 철종 역의 유지태 선배님은 이번에 처음 볼링을 접했는데도 점수를 240까지 올리셨어요(웃음).” 왕년의 볼링 천재였지만 지금은 도박 볼링으로 연명하는 철종. 그와 영훈이 쌓는 우정은 극 전체를 지탱하는 중요한 감정이다. “그 애틋함을 표현하기 쉽지 않았죠. 영훈은 철종과 긴 대화를 나누기도 어렵고, 충분하게 감정을 표현하기도 힘드니까요. 촬영 중반에 (유지태) 선배님이 저를 배우로서 믿고 기다려 준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때 ‘아, 지금의 감정이 영화에도 나타나겠구나’ 싶었죠.”

이다윗은 “‘스플릿’ 촬영 현장에서 느낀 치열함과 따뜻함에 크게 자극받았다”고 했다. “연기는 꽤 오래했지만, 여전히 내 연기의 특색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는 한 작품 한 작품에 출연하며 얻은 자극으로 한걸음씩 나아간 것 같아요.” 하지만 많은 영화 팬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창동 감독에게 제63회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안긴 ‘시’의 이다윗을 말이다. 무심하고 심드렁한 표정의 어린 가해자 종욱을 그는 아주 사실적으로 연기해 냈다. “‘시’ 촬영을 앞두고 머리카락이 엄청 빠질 만큼 긴장했어요. 첫 대본 리딩 때 이창동 감독님께서 딱 두 마디 조언해 주셨어요. ‘힘 빼고, 자연스럽게.’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전혀 몰라 괴로웠죠.” 촬영의 막바지, 이다윗은 이 감독과 김현석 촬영감독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 한마디에 ‘‘시’ 촬영만 끝나면 연기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던 마음을 거뒀다. 그가 연기의 지침으로 삼는 이 감독의 말은 “넌 정적인 연기는 잘하니까, 쓸데없는 것을 해 봐”였다. “정말 아리송한 말이죠.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조금은 이해해요. 사람들은 일상에서 쓸데없는 행동을 많이 하잖아요. 머리를 쓸어 올린다거나, 갑자기 다른 곳을 쳐다본다거나. 그런 디테일을 포착해 연기할 때 극 중 캐릭터가 실제 인물처럼 보이는 것 같아요.”

배우가 아닌 인간 이다윗에 관해 물었더니, “느긋하기 그지없는 둥글둥글한 성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강에 띄운 배처럼 흘러가는 대로 사는 편이에요. 하지만 무슨 일이든 갑자기 ‘재미없다’고 느끼면 그만두죠. 평소에는 친한 형들 만나서 밥 먹고, 게임하고, 그냥 평범하게 지내요.” 부드러운 성격에 밴 고집과 집중력이 지금껏 그를 배우로 살게 만든 원동력일까. “단 한 번도 ‘연기가 싫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배우로서 욕심도 많고요. 스릴러영화에서 능동적으로 나쁜 짓 저지르는 범인을 연기해 보고 싶어요. 하지만 ‘어떤 작품으로 인지도를 높여야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관심은 오직 하나예요. 나에게 주어진 배역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표현할 것인지. 그렇게 연기하는 순간이 가장 즐겁고 흥미로워요.”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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