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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관계, 금기의 벽 허무는 사랑을 그리는 거장

중앙일보 2016.11.18 00:01
줄리에타

줄리에타

스페인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다른 수식이 거추장스러운, 페드로 알모도바르(65) 감독의 신작이 개봉한다. 제69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던 ‘줄리에타’(원제 Julieta, 11월 17일 개봉)다. 이 영화엔 알모도바르 감독이 오랫동안 탐구해 온 주제, 인간의 욕망과 뒤틀린 인간관계에 대한 성찰은 물론이고 전작들에서 보여 주지 않았던 새로운 면도 알알이 박혀 있다. 거의 모든 영화를 직접 쓴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어 온 그가,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단편 소설집 『런어웨이』 중 세 편 ‘머지않아’ ‘우연’ ‘침묵’)을 엮어 각색해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이름 자체가 장르가 된 그의 신작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사생활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꺼려 심지어 출생 연도의 진실조차 베일에 가려진 알모도바르 감독. 그러나 자신의 영화에서만큼은 언제나 극한의 사랑과 삶의 진실을 용감하게 마주해 왔다. ‘줄리에타’의 개봉을 맞아, ‘페드로 알모도바르’란 장르를 헤집어 봤다.

 
1 강렬한 미스터리의 힘
중년 여인 줄리에타(엠마 수아레스)는, 우연히 마주친 딸의 친구에게서 딸 안티아(블랑카 파레스)의 소식을 듣는다. 12년 전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안티아. 줄리에타는 딸에게 과거를 고백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하고, 이야기는 젊은 날의 줄리에타(아드리아나 우가르테)에게로 향한다. 고전문학 강사인 줄리에타는 기차에서 만난 어부 소안(다니엘 그라오)과 하룻밤을 보낸 후, 그의 아이를 갖게 된다. 소안의 집을 찾아가 그와 가정을 꾸리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며 줄리에타의 행복은 부서지고 만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줄리에타’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가 늘 그렇듯 강렬한 미스터리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주인공은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있고, 우리는 안티아가 대체 왜 그렇게 사라졌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사실 미스터리는, 그의 초기작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 이하 ‘신경쇠약’)에서부터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이하 ‘내 어머니’) ‘귀향’(2006) 등 그의 대표작을 관통하는 가장 큰 힘이다. ‘신경쇠약’에서 페파(카르멘 마우라)는 임신했지만 연인의 행적을 도무지 알 수 없고, ‘내 어머니’의 마뉴엘라(세실라 로스)는 아들을 잃은 후 헤어진 남편을 찾아 나서지만 뭔가 큰 비밀을 감추고 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의 엄마가 돌아오는 ‘귀향’은 말할 것도 없다.
귀향

귀향

이러한 작품들의 미스터리에 공통점이 있다면, 대개 오래전부터 누군가와 헤어져 지낸 인물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남장 여자, 동성애 등 알모도바르 감독의 단골 소재가 담뿍 담긴 ‘나쁜 교육’(2004)은,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다시 만난 두 친구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극을 이끈다.

 
2 언제나 그랬듯, 여성을 위한 찬가
“이 영화의 주제는 여성적인 우주를, 즉 온통 목가적이고 장밋빛으로 빛나는 어떤 마을을 그려 내는 것이다. 그 마을은 완벽하게 인간적인 우주로서 모든 것이 매력 넘치는 공간이다.”(『알모도바르 영화』(전기순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신경쇠약’에 대해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흐른 지금 말한 것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누구보다 맹렬하게 여성성의 가치를 탐구해 왔다. 그의 영화 속 남자들은 대부분 무기력하고 거짓말을 일삼지만, 여성 혹은 여장 남자나 트랜스젠더처럼 ‘여성성을 장착한’ 캐릭터들은 생동감이 흘러넘친다.
그녀에게

그녀에게

‘줄리에타’에는 동성애자나 여장 남자가 이야기 전면에 등장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는 단연 여성들이다. 소안은 잘생긴 사내지만 어딘지 모르게 나약하며, 공공연하게 친구 아바(인마 케스타)와도 관계를 가진다. 줄리에타가 이를 질책하던 날,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줄리에타는 극심한 죄책감으로 고통받는다.

돌이켜 보면, 그의 영화 속에서 도덕적 책임감을 가지고 남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인물들은 언제나 여성이었다. ‘내 어머니’의 마뉴엘라는 제 남편의 아이를 가진 로사(페넬로페 크루즈)를 가족처럼 품는다. ‘귀향’ 속 남자들은 근친상간하거나 의붓딸을 범하는 파렴치한이지만, 그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 역시 여자들이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줄리에타’에도 상징적 장면 하나를 심어 둔다. 조각가 아바가 남성 조각품들을 빚는 모습을 두고,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성은 남성의 창조자다. 남성들은 그 손에 비해 아주 작은 조각품으로 표현된다. 마치 킹콩의 손안에 있는 금발의 포로처럼! 여성은 남성에게 생명을 줄 뿐 아니라, 남성보다 더 강인한 존재다. 싸우고 고통받으면서도 인생이 주는 행복을 누릴 줄 안다.”

여성성의 가치를 탐구하며 궁극적으로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관계도 때론 세상에 존재하고, 금기의 벽을 허물고도 사랑은 피어나며, 고통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건 결국 서로뿐이란 사실’이다.

 
3 영화와 연극, 세상 모든 여배우를 향한 오마주
알모도바르 감독은, 영화 속 영화나 공연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에둘러 꺼내는 데 능한 감독이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그녀에게’(2002). 무용수 알리샤(레오노르 와틀링)를 사랑하는 남자 간호사 베니뇨(하비에 카마라)는 식물인간이 된 알리샤를 돌보며 그녀가 좋아했던 작품들을 보러 다닌다. 그렇게 피나 바우시의 무용극이, 가상의 무성영화 ‘애인이 줄었어요’가 등장한다. ‘내 어머니’에는 유명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중요한 소재로 쓰인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영화 속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솜씨는 그의 20대 시절에서 기인한 것일 터다. 스페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죽고 민주주의가 싹트며 시민들의 억눌렸던 감성이 폭발하던 시기에 20대를 보낸 그는, 연극 배우·밴드 보컬·작가 등으로 활동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영화에 다른 작품을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나쁜 교육’이나 ‘브로큰 임브레이스’(2009)처럼 극 중 주인공이 배우인 영화가 유독 많은 것도 그래서다.

그런 알모도바르 감독의 스타일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어떤 ‘영화 속 영화’도 등장하지 않는 ‘줄리에타’가 오히려 낯설게 보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는 고전문학 강사인 줄리에타가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영화 속 영화’를 대신한다. “신들은 찰흙과 불의 도움으로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말을 던져 놓고, 갑작스레 임신 사실을 고백하는 식이다.

 
4 스페인에 의한, 스페인을 위한
알모도바르 감독 영화의 화룡점정은 ‘스페인’이란 나라 그 자체다. 그의 영화를 처음 보는 이들은 강렬한 원색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눈부시게 새빨갛거나 파란 옷, 벽지, 소품은 그 자체로 ‘정열의 나라’ 혹은 ‘태양의 나라’로 불리는 스페인을 상징한다. 그는 민속 노래, 투우 등도 열심히 끌어다 쓴다.

베이스캠프는 스페인 마드리드다. 우디 앨런 감독과 미국 뉴욕을 떼어놓을 수 없듯, 알모도바르 감독 또한 마드리드와 떼어놓을 수 없다. 그는 이 도시를 중심으로 스페인 구석구석을 카메라에 담는다. 바르셀로나(내 어머니), 라만차(귀향), 갈리시아(줄리에타), 세고비아(그녀에게), 톨레도(내가 사는 피부) 등 수많은 지역이 그의 영화 속에서 매력을 뽐낸다. 특히 ‘귀향’에서는 라만차 지역의 시골 마을이 지닌 마력과 이야기의 힘이 맞물려 전 세계를 매료시켰다. 이 영화는 제59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과 여우주연상 등을 휩쓸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을 각색했지만, 스페인만의 색채는 포기하지 않았다. “먼로의 스토리는 ‘줄리에타’의 근원이다. 하지만 캐나다 작가의 스타일로 내 영화를 만드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영어로 연출하는 일에 자신 없기도 했고, 언어와 문화·장소를 낯선 곳으로 바꾸는 것이 겁났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결국 ‘줄리에타’는 스페인에서, 스페인 배우들의 연기로 탄생했다.

모국에 대한 그의 애정과 자부심은, 그 지역 예술가와 적극적으로 협업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줄리에타의 집에 걸린 그림은 갈리시아의 화가 세와네의 작품이라고. “갈리시아의 집에 실제 그곳의 화가들과 공예사들 작품을 담길 원했다”는 게 알모도바르 감독의 말이다. 그 그림은 당연히 ‘줄리에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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