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수대] 율리아나의 내려놓기

중앙일보 2016.11.16 19:00 종합 35면 지면보기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시절이 을씨년스럽다. 초겨울 날씨도 스산하지만 그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뻥 뚫린 마음 탓일 게다. 꼭 111년 전 오늘, 대한제국 백성의 가슴에도 찬바람이 일었다. 1905년 11월 17일 우리나라 외교권을 일제(日帝)에 넘겨준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온 나라가 비통해했다. 오죽했으면 ‘을사년스럽다’는 말까지 생겼을까. 지금 우리가 쓰는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이 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아픔이다.

하지만 우리는 슬픔에 주저앉지 않았다.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날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이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길이 전하자는 뜻에서다. 97년에는 정부기념일로 지정됐다. 올해도 어김없이 기념 행사가 열린다. 국가보훈처는 제77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독립투쟁을 하다 옥고를 치른 12명을 포상한다고 발표했다.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하는 자리다.

지난 주말 광화문의 거룩한 분노도 비슷하다. 비틀린 통치권에 앗긴 국민 주권 회복을 선언한 한바탕 축제였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이 나온 서울 성심여고 재학생들이 편지를 낭독하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무대에 오른 학생들은 ‘진실, 정의, 사랑’이라는 교훈을 들며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는 박근혜 선배님과 다른 후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선배 박근혜는 아직 후배들의 간절한 호소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시계를 4년 전으로 돌려본다. 2012년 이맘때 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자격으로 모교를 방문했다. 연예인에 버금가는 환대를 받았다. 당시 박 후보는 “성심을 다니면서 삶을 사랑하는 방법,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기에 정치를 하면서 바르게 뚜벅뚜벅 걸어올 수 있었다”고 했다. 학교 성당도 찾아 천주교 주모경(主母經)을 외며 이 땅의 평화를 기원했다. 그때 박 후보의 기도가 거짓은 아니었을 것으로 믿는다.

공식적으로 무교(無敎)인 박 대통령은 성심여중 시절 ‘율리아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율리아나는 평생을 자선과 봉사로 살았던 13세기 이탈리아 성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오는 20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선포한 ‘자비의 해(희년)’가 마무리되는 날. 자비의 시작은 회개다. 박 대통령은 자신을 비우고 잘못을 털어놓아야 한다. 처벌도 감수해야 한다. 이게 선열과 후학에 대한 ‘율리아나 박근혜’의 마지막 책임이다. 시간을 끌수록 허물은 더 커지는 법이다.

박정호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