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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아이슬란드에 대한 영화적 체험. '램스'

중앙일보 2016.11.16 15:34

영화가 시작하면 스크린에 드넓은 목장이 펼쳐진다. 평화롭게 노니는 양 떼가 등장하며 곧이어 늙은 두 남자가 별말 없이 서성거린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양 떼와 목장이라니, 지루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하지만 무심코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이야기에 빨려들고 만다. 코미디영화는 아니지만 슬금슬금 웃음 짓게 하는 이야기, 오래도록 눈가에 머무는 아이슬란드 특유의 풍경이 발휘하는 흡인력도 만만찮다. ‘램스’(원제 Hrútar, 11월 3일 개봉) 얘기다. 지난해 열린 제68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차지한 작품으로, 아이슬란드 감독 그리머 해커나르손(39)이 만들었다. 독특하고 신비로우며 웃기다가 짠한, 이 영화의 정체는 무엇일까. 언론 시사회에서 보자마자 부랴부랴 해커나르손 감독에게 e-메일 인터뷰를 청했다. 그는 여행 중이라면서도 “한국에 내 영화를 소개할 수 있어 기쁘다”며 정성 어린 답변을 보내왔다.

램스 스틸컷


'램스' 그리머 해커나르손 감독

아름답고 평화로운 아이슬란드의 어느 시골 마을. 같은 목장에서 지내는 구미(시구르더 시거르존슨)와 키디(테오도르 줄리어슨) 형제는 양을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지만, 정작 둘은 40년째 말하지 않고 지낸다. 키디가 키우던 양이 마을의 양 선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구미의 질투를 산 것도 잠시, 곧 마을에 치명적인 양 전염병이 돈다. 양을 모두 도살해야 하는 위기에 처한 형제는 어쩔 수 없이 의기투합하게 된다.
 

그리머 해커나르손 감독


그리머 해커나르손 감독이 이 영화의 소재를 떠올린 건, 2008년 전 세계에 금융 위기가 불어닥친 때였다. “은행들의 탐욕으로 국가가 도탄에 빠졌을 때, 우리의 근원지·자연·전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는 그는 “전통이란, 어떤 공동체가 오래전부터 공유하는 문화와 가치다. 자연스럽게 아이슬란드의 목축업이 떠올랐다. 배려와 보살핌이 기본인 목축업은 많은 사람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탐욕스러운 금융권과 대조되는, 우리의 근원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골살이 경험이 없다면 선뜻 떠올리기 힘든 소재인데.
 “내 부모님은 시골에서 자라셨고, 나 역시 10대 시절 여름 방학마다 시골에서 살며 일을 도왔다. 내게 아이슬란드 시골 풍습과 구전되는 이야기, 독특한 지방 언어에 대한 감이 있는 것은 그래서다. 농업부에서 일하신 아버지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는데, 특히 ‘특정 전염병이 돌 때 가축을 도축할지 말지 결정하는 일이 무척 어렵다’고 하신 말씀이 잊히지 않았다. 실제 ‘스크래피(Scrapie)’라는 질병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끼쳐, ‘30년 전에 비해 아이슬란드 양이 3분의 1로 줄었다’고 했다. ‘램스’는 그 모든 경험을 토대로 만들었다.”
많은 동물 중에서도 왜 하필 ‘양’인가.
 “아이슬란드, 특히 북부 시골 지역에서는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목양이 생활과 문화의 중심이었다. 먹고살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동물이었기에, 우리에게 양은 자부심이자 전통이다. 지금은 목양이 사양 산업이지만, 사람들은 양에 아주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아이슬란드 북부의 ‘바르다르달루르(Bardardalur)’라는 시골 지역에서 촬영했는데, 이곳에서는 지금도 많은 농부가 양을 키운다. 대부분 세트 없이 목장에서 직접 촬영했다. 이야기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목장의 여름과 겨울 풍경을 모두 담았다.”
양들도 오디션을 봤다고 들었다. 대체 무슨 기준으로 뽑았나.
 “양들도 배우들처럼 외모와 성격이 중요했다! 잘생겨야 하고, 순해야 했다. 양 트레이너도 항시 대기 중이었다. 기억에 남는 건 구미가 양을 목욕시키는 장면이다. 장정 다섯 명이 양을 붙잡아 겨우 진행할 수 있었다. 다행히 배우들이 목양 경험이 있었고, 철저하게 트레이닝해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
장면 하나하나가 그림 같다. 특히 구미가 양들을 직접 죽인 후 축사에 앉아 수의사를 맞이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름답고 강렬한 장면을 만드는 데 굉장한 정성을 기울였는데, 당신만의 영화 미학이라면.
 “정지된 와이드 숏과 롱테이크를 좋아한다. ‘램스’에서는 주인공들이 자연과 아주 가까이 살기 때문에, 자연 풍광과 인물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중요했다. 풍광을 잘 보여 주고 싶어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했다(이 렌즈를 쓰면 화면이 무척 깨끗하고 선명하게 나온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 벤 스틸러 감독) 아이슬란드 촬영분도 아나모픽 렌즈로 찍었다).”
 

램스 스틸컷


숨 막히는 풍경으로 관객을 휘어잡던 이야기는, 점점 형제의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바로 옆에 살면서 으르렁대는 형제의 이야기가 드넓은 목장, 도살되는 양들의 모습과 겹치며 유머러스하게 진행되다가도 묘한 비애감을 안긴다. 해커나르손 감독은 이 모든 것이 “아이슬란드다운 것”이라 말했다.

 
수많은 인간관계 중에서도 형제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라면.
 “아이슬란드에는 바로 옆집에 살면서도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는 형제에 관한 설화가 유난히 많은데, 그러한 이야기를 토대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실제로 시골에 구미나 키디처럼 혼자 사는 남자가 흔하기도 하고.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고집 세고 독립적인 기질이 있어, 외부 사람들을 잘 믿지 않는다. 고집불통이라 해야 할까. 그들이 아이슬란드식 ‘딱딱한 유머’를 보여 주는, 비극적인 면을 지닌 코미디영화에 잘 맞는 주인공이라 생각했다.”
형제가 왜 말을 하지 않는지, 그 이유는 끝까지 알 수 없는데.
“만약 ‘램스’가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분명히 구구절절 설명했을 거다. 플래시백도 쓰고, 대사도 넣고. 그러나 나는 영화에 대한 해석을 관객에게 맡겨 두고 싶었다. 그게 유럽 영화와 미국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 아닐까.”
당신이 생각하는 ‘아이슬란드의 정서’란 무엇이기에.
“애증?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것. 유머와 비애, 가벼움과 심각함이 함께 있는 것. ‘램스’에 그걸 담아내려 했다.”

해커나르손 감독은 체코 프라하 필름 아카데미 유학 시절, 졸업 작품으로 만든 단편영화 ‘공중화장실’(2004)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램스’로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우뚝 올라섰다. 1년에 자국 영화가 열 편 남짓 나오는, 영화 산업 규모가 무척 작은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슬란드 곳곳의 유려한 광경을 배경 삼은 할리우드 영화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주목받는 만큼 책임감도 클 것 같다.
 “아이슬란드 영화계는 작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특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SF나 시대극은 만들 수 없기에 아이슬란드 감독들은 주로 예술영화를 만든다. ‘램스’ 엔드 크레딧에는 거의 모든 아이슬란드 영화계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우리 영화계가 그만큼 가족적인 분위기다. 그게 여기만의 스타일이다. 최근에는 여러 신인도 데뷔하고 있다.”
차기작은.
“일상생활에서 주로 영감받는 편이다. 책이나 신문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여러 이야기를 생각 중이지만 확실히 결정되지는 않았다. 아마 ‘램스’와 비슷한 톤의 작품이 될 것 같다.”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좋은 영화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을 고민거리에서 잠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글=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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