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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창고] “현대음악이 어렵다고? 감동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중앙일보 2016.11.16 00:01 강남통신 12면 지면보기
클래식
‘메시앙의 수제자’ 에마르 피아노 독주
20세기 작곡가, 현존 작곡가의 음악을 탐구해 청중에게 꾸준히 소개하는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가 두 번째 내한 독주회를 연다. [사진 LG아트센터]

20세기 작곡가, 현존 작곡가의 음악을 탐구해 청중에게 꾸준히 소개하는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가 두 번째 내한 독주회를 연다. [사진 LG아트센터]

살아있는 작곡가 작품 파고든 피아니스트
손등으로 연주하고, 새 울음소리도 재현
마냥 듣기 좋은 음악 대신 생각의 기쁨 선사


티켓이 많이 팔리기 어려운 음악회인 건 인정한다. 피에르 로랑 에마르(59)의 피아노 독주회에서 연주될 곡목만 나열해 보자. 헝가리 작곡가 죄르지 쿠르탁(90)의 ‘게임’과 ‘조각’. 프랑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1908~92)의 ‘새의 카탈로그’ 중 ‘마도요’와 ‘숲 종다리’. 우선 살아있는 작곡가의 음악이라는 데서 청중의 기가 한번 눌린다. 현대 작곡가, 그 중에서도 생존 작곡가의 음악이 어떻던가. 이전 작곡가들의 스타일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추구하는 새로운 기법은 언제나 청중을 난해함의 나락으로 밀어 넣곤 한다. 메시앙은 또 어떤 작곡가인가. 음의 높낮이·길이·셈여림 같은 요소에 순서를 부여하고 프로그램화 되도록 하는 복잡한 기법을 창안했던 작곡가다. 이해하기도 복잡한 이론의 토대 위에서 전위적 음악을 썼다.

그런데도 이 음악회를 권하는 이유가 있다. ‘언제까지 마음으로만 음악을 들을 건가’라는 질문 때문이다. 바흐·모차르트 등을 들으며 감동하는 이유는 대부분 아름다움 때문이다. 물론 바흐의 푸가처럼 수학·건축을 연상시키는 음악에서 지적인 쾌감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19세기 이전까지의 음악에서 기대하는 것은 감동인 경우가 많다. 20세기 이후의 현대음악과 비교해서 그렇다. 아름다운 선율, 맞아떨어지는 화음, 규칙적인 리듬이 듣기 좋은 음악의 요소로 자리했다.

20세기 이후의 음악은 다르다. 듣기 좋던 화음은 조각조각 깨지고, 리듬이란 건 종잡을 수 없게 되고, 멜로디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고 현대 음악을 피해야 할까. 우선 에마르가 연주할 쿠르탁의 ‘게임’을 들어보자. 요즘은 유튜브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애들이 장난하는 것처럼 손등으로 피아노 건반을 하염없이 훑는다. 왜 이런 작곡을 했을까. 쿠르탁의 ‘게임’은 그가 음악적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 곡이다. 그는 음악의 요소를 잘게 부수고 그것들이 파편·순간이 되도록 했다. 음들이 흩뿌려지듯 나열되는 작품은 기존의 음악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 음악은 멜로디가 지속적으로 연결돼야 하는가, 모든 요소들이 왜 한 데 어울려 음악이 돼야만 하는가.

이런 식으로 20세기 이후 작곡가들은 음악 안에 메시지를 더 많이 넣었다. 메시앙의 ‘새의 노래’ 또한 질문한다. 왜 음악은 늘 추상을 그려야 하나. 그는 전 세계를 돌며 새의 소리를 채집했다. 그리고 그 소리를 그리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구체적인 새의 종류까지 들어 그 새의 울음소리를 악기로 표현해냈다. 이것은 음악이 아닌가? 우리는 구체적 대상을 그린 음악을 들으면 어떤 상상을 하게 되는가.

현대음악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리고 청중은 그 질문을 함께 던지거나 혹은 자신만의 답을 찾기도 하면서 음악을 듣는다. 지금까지 마음으로만 음악을 들었던 사람들은 이제 머리를 쓰며 음악을 듣는다. 그러니 현대 음악이 어려워졌다고 예전과 비교만 할 일은 아니다. 음악을 듣는 방식과 이유가 바뀐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현대음악은 감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기 위해서 듣는 음악이다.(물론 작곡가의 신념에 따라 종전 기법으로 이전 시대와 같은 감동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에마르는 동시대 음악이 가는 길의 맨 앞장에 서 있다. 20세기 음악의 역사는 대부분 전위적인 작곡가들 중심으로 서술돼 있지만, 만일 연주자의 역사를 따로 쓴다면 에마르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그는 18·19세기 작곡가의 유훈(遺訓)을 찾으려 애쓰는 대신,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과 생각을 파고든다. 16세에 메시앙의 수제자가 됐고 ‘메시앙 페스티벌’의 음악 감독을 맡았다. 또 쿠르탁의 음악세계가 궁금해 헝가리로 날아가 작곡을 배웠다. 쿠르탁은 ‘이름 없는 수난곡’을 작곡해 에마르에게 헌정했고 이 곡은 이번 무대에서 한국 초연된다.

그러니 생각하며 음악을 들어보고 싶은 청중이라면 에마르의 내한 공연에 갈 만하다. 그의 독주회 프로그램 또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에마르는 20세기 이후 작곡가 뿐 아니라 다양한 시대의 작곡가를 배치했다. 16~17세기의 얀 스베일링크가 네 개의 성부를 쌓아올려 만든 환상곡을 가장 먼저 연주한다. 그 후에 쿠르탁의 1970년대 작품을 들려주고 이어서는 19세기의 로베르트 슈만을 선택했다. 이후엔 다시 쿠르탁으로 돌아간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약 5세기를 아우르는 작품들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해야 한다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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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프로그램도 간단치 않다. 17세기에서 시작해 20세기 메시앙으로 넘어가고 갑작스럽게 쇼팽의 녹턴을 연주한다. 이어서 메시앙을 다시 연주한다. 어떤 의미일까. ‘새’와 ‘밤’ ‘자연’이라는 키워드를 짚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해석은 청중의 몫으로 남기는 편이 나을 터다. 청중이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20세기 음악의 목표였으니 말이다. 에마르의 독주회에 간다면 자신만의 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주는 감동 대신 메시지 있는 음악이 주는 생각의 기쁨을 얻을 수도 있다. 결국에는 이 또한 감동이 아닐까. 이참에 음악 듣는 방법에 변화를 줘볼 수도 있다. 그 변화를 감수하면 무궁무진한 새로운 음악들이 기다리고 있다. 익숙한 것 대신, 새로운 감동의 가능성이 저 밖에서 넘실댄다. 2012년 현대음악의 향연에 가까웠던 에마르의 첫 내한 독주회가 흥행 면에서는 큰 성과가 없었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하는 제안이다. 에마르의 두 번째 내한 독주회는 24일 오후 8시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린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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