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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좋은 구두? 20년 넘게 신을 수 있어야”

중앙일보 2016.11.09 00:01 강남통신 6면 지면보기
|힐러리 프리먼 에드워드 그린 CEO
에드워드 그린의 힐러리 프리먼 CEO. 구두는 디자인·편안함·내구성 3박자를 모두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드워드 그린의 힐러리 프리먼 CEO. 구두는 디자인·편안함·내구성 3박자를 모두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드워드 그린’이라는 구두 브랜드를 들어 봤는지. 아마 열에 아홉은 아닐 거다. 저 멀리 영국 노스햄튼(Northamton)이라는 곳에 공장을 두고 한 주에 60~70켤레만 소량 생산하는 업체를 알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생긴 지 129년이나 됐고, 그 세월 동안 헤밍웨이·윈저 공은 물론 현재의 영국 로열 패밀리까지 20년씩 신는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지난달 31일 만난 힐러리 프리먼(Hilary Freeman·70) CEO 역시 “일반 영국인도 잘 모를 브랜드”라며 여유를 부렸다.
프리먼 CEO는 지난달 29~30일 한국을 찾아 고객들에게 직접 구두 피팅을 해주는 ‘트렁크쇼’에 참석했다.

프리먼 CEO는 지난달 29~30일 한국을 찾아 고객들에게 직접 구두 피팅을 해주는 ‘트렁크쇼’에 참석했다.

“한 번 신어보면 남다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자부심 찬 표정을 지으며. 그는 인터뷰 내내 ‘품질’이라는 단어를 강조했고, 100만원이 훌쩍 넘는 신발을 만들면서도 럭셔리와는 거리가 멀다’라며 거리를 뒀다. 구두 한 켤레에 담긴 그의 인생과 철학, 비전이 궁금해졌다.

프리먼 CEO는 지난달 29~30일 양일간 고객들에게 직접 구두 피팅을 해주는 트렁크쇼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제품의 75%를 수출하는데, 워낙 소량 생산이다보니 각국에 판매 대행처를 둔다. 국내에서는 서울 신사동 구두전문점 ‘유니페어’에 입점해 있다.

이 브랜드는 오랜 역사를 거쳐오며 굴곡이 있었다. 창업 이래 군화 제작 등으로 전성기를 맞았지만 부도 직전까지 몰려 1979년 미국인에게 매각했다. 하지만 미국 경영진 역시 돌파구를 찾기 힘들었다. 때마침 밀라노에서 공부하고 새빌로우(런던 맞춤정장 거리)에서 일하던 구두 디자이너 존 흘루스틱(John Hlustik)이 빚탕감을 조건으로 1파운드(약 1400원)에 브랜드를 다시 사들여 재건에 성공한다. 바로 프리먼의 파트너(이후 남편으로 표기)다. 둘은 사실혼 관계였으나 법적 부부가 아니라서 성이 서로 다르다. 프리먼은 남편이 2000년 갑작스럽게 사고로 세상을 뜨자 기존의 세일즈 업무를 비롯해 경영 전면에 나섰다.
에드워드 그린이 입점돼 있는 서울 신사동 ‘유니페어’ 매장.

에드워드 그린이 입점돼 있는 서울 신사동 ‘유니페어’ 매장.

갑자기 경영을 맡아 부담이 컸겠다.
“당시 모두 ‘이제 공장 문을 닫겠구나’ 했다. 직원을 모아놓고 이야기했다. 당신들이야말로 남편이 원했던 구두를 제일 잘 알고, 또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물론 시스템은 바꿨다. 예전과 달리 부문별 리더를 뽑아 위계를 만들었다. 부문장에겐 런던에서 별도 수업을 받게 했다. 내가 해외에 와 있어도 전혀 문제없을 정도로 버팀목이 돼 주고 있다.”
남편의 부재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품질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싸구려 소재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충분히 쉽고 편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미래를 내다봤다. 남편을 만나 다시 영국으로 건너 오기 전 파리에서 16년 간 살았는데, 그곳에선 하나를 사더라도 제대로 사야한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런던도 그렇게 될 거라 봤다. 그 때를 기다렸다. 생각해보라. 운동화를 열 켤레 사서 1년씩 신고 버리느니 좋은 구두를 20년간 신는 게 낫지 않나. 영국으로 올 때 친구한테도 말했다. 드라이크리닝 잘 하는 사람과 구두 수선 베테랑을 찾아달라고.”
말만큼 수선해서 오래 신기가 쉽지 않다.
“바닥을 본드로 붙이는 방식이라면 그렇겠지만 에드워드 그린은 다르다. ‘굿이어웰트’라는 제작법 때문이다. 구두 본체와 바닥창을 내부에서 가죽 띠로 먼저 연결하고 밖에서는 벨트처럼 이어 꿰매는 방식이다. 또 걸을 때 힘을 받는 부분에 코르크를 넣어 충전재를 만들어준다. 구두는 대개 3~4년 신으면 헐게 마련이다. 이때는 바깥 스티치를 뜯어내 창과 코르크를 바꾸면 된다.”
에드워드 그린 구두 안쪽에는 ‘티켓 넘버’가 붙어 있다. 사이즈 외에 판매처·제작방식 등 다양한 정보가 숨어 있는 숫자다.

에드워드 그린 구두 안쪽에는 ‘티켓 넘버’가 붙어 있다. 사이즈 외에 판매처·제작방식 등 다양한 정보가 숨어 있는 숫자다.

실제로도 오래 신은 구두가 있나.
“물론이다. 파리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그러더라. ‘좋은 신발을 신고 싶으면 전화하라’고. 그땐 ‘지난 주 이미 페라가모 구두를 샀다’고 무심코 대꾸했는데, 생각해 보니 괜찮은 남자 같았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고 실제로 나를 위한 구두를 만들어 줬다. 그런데 얼마 전 그 구두가 사망 선고를 받았다. 25년 간 네 번쯤 수선을 해왔는데 더이상은 힘들다고 한다.”
보통 세월이 흐르면 기계나 부자재가 남아 있기 힘들지 않나.
“우리 구두 안쪽에는 번호가 있다. (신발을 꺼내 보이며) 첫 줄이 영국 사이즈- 미국 사이즈-발볼-구두 형태를 의미하고, 아랫줄 ‘티켓 넘버’는 일종의 바코드 같은 거다. 제조년월-판매처-제작방식 등을 뜻한다. 시간이 지나도 구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워싱턴에 행사를 갔더니 한 신사가 자기 에드워드 그린 구두를 보여주며 ‘이제는 이런 품질의 구두가 없죠’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다. ‘그럼요. 없죠. 더 나은 구두밖에 없을 걸요.’ 당장 공장에 전화해서 그 신사가 신은 티켓 넘버로 1994년 미국 달라스 니만마커스 백화점에 산 구두라는 걸 알아냈고, 스티칭 하나까지 똑같은 모델의 구두를 만들어줬다.”
구두를 보면 주인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에드워드 그린을 신은 신사는 어떤 사람일까.
“스마트하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다. 스마트 하다는 건 좋은 물건을 오래오래 쓰는 중요성을 안다는 의미다. 자신감은 패션으로서가 아니라, 편안한 구두를 신고 자기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모습이다. 피티워모(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리는 남성복 박람회)에 가면 빨강·오렌지·녹색처럼 튀는 옷을 입고 사진 찍힐려고 서성이는 남자들이 태반이다. 꼭 공작들 같지 않나. 신사라면 편하고 좋은 신발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진짜 일에만 집중하는 남자다.”
에드워드 그린의 대표 구두들. 본드 접착이 아닌 바느질로 제작해 3~4년에 한 번씩 수선해가며 20여 년을 신을 수 있다고 한다.

에드워드 그린의 대표 구두들. 본드 접착이 아닌 바느질로 제작해 3~4년에 한 번씩 수선해가며 20여 년을 신을 수 있다고 한다.

남자를 신발로 평가하겠다.
“맞다. 언젠가 뉴욕 공항에 피곤에 쩔은채 내렸다. 그런데 얼핏 본 남자가 너무 멋있는 거 아닌가. 아름다운 회색 수트를 입고 있었다. 제대로 보고 싶어 얼른 쫓아갔는데 바로 ‘아니다’ 하고 돌아섰다. 그 멋진 옷에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였다. 아무리 유행이라지만 신사의 복장은 아니다.”
발 편한 구두를 고르기가 힘든데.
“넓이와 길이의 조화가 중요하다. 실제 발의 길이를 재 보고 여기에 엄지손톱만큼 여유가 있는 구두를 골라야 한다. 발이 좁은 사람은 길이가 맞는데도 왠지 넉넉하게 느껴져서 더 작은 사이즈를 달라고 한다. 하지만 결국 불편해서 오래 신기가 어렵다. 길이는 같더라도 발볼이 좁은 신발을 사야 한다. 에드워드 그린은 그래서 한 사이즈에 발볼을 7가지로 만든다.”
신사라면 몇 개의 구두를 가져야 할까.
“적어도 2개다. 구두는 한 번 신으면 24시간은 벗어둬야 한다. 예전에 런던에서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공장을 찾아왔다. 아버지가 우리 구두를 사라고 했단다. 실제로 신어보고 너무 만족해하며 ‘매일 신겠다고’고 하길래 그럼 두 켤레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장삿속 같지만 진짜 그렇다. 구두는 땀이 나면 완전히 건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슈트리에 넣어 보관해야 한다. 슈트리를 안 쓰면 아무리 좋은 구두도 2~3개월 안에 앞코가 들리면서 모양이 바뀐다. 어쨌거나 끈으로 묶는 진갈색 구두는 무조건 필수다.”
구두가 100만원이 넘는다니 만만치 않다.
“가격 때문에 럭셔리라는 이야기를 듣지만 절대 럭셔리가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값이 아니라 품질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조차 에드워드 그린을 모르는 사람이 꽤 있을 거다. 하지만 품질을 따지는 사람들은 이름에 상관없이 사게 되고, 나중에서야 브랜드명을 기억한다. 이름에 먼저 기대를 갖고 산다거나 소유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럭셔리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글=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에드워드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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