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순실이 머문 독일 '타우누스 산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땅

중앙일보 2016.11.07 14:59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교 타우누스(Taunus) 산지에 있는 고대 로마 유적입니다. 2005년도 로마세계 여행 때 들른 곳입니다. 계절이 이맘때였던 모양입니다. 숲이 온통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 풍광이 대단했습니다. 이곳을 갑자기 떠올린 것은 '타우누스'라는 지명이 갑자기 신문에 등장하면서 대한민국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최순실 모녀의 어지러운 발자국이…

프랑크푸르트에서 교외선 기차를 타고 한 시간쯤 북쪽으로 달리면 도착하는 이곳에는 최순실 모녀의 어지러운 발자국이 찍혀있습니다. 그들은 아름답고 한적한 이곳에 집과 호텔을 구입해서 지내다 취재진이 몰려오자 급히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타우누스 산지에 있는 로마 유적은 2세기에 건설한 것으로 게르만족을 방어하던 대대급 병력의 주둔기지입니다. 로마는 동쪽의 게르만족을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방어선 삼아 막았는데 두 강의 상류 사이에는 자연적인 방어선이 없었기 때문에 인공 방벽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리메스(Limes)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군데군데 흔적이 남아 있어서 현장에 가면 고대 역사가 손에 잡힐 듯 합니다. 사진의 기지는 기단만 남아 있던 것을 19세기에 복원한 것입니다. 리메스를 계획하고 건설한 사람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치세 AD 117~118)입니다. 그의 동상이 기지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드리아누스에게는 동성(同性) 애인이 있었습니다. 안티노스라는 그리스 소년으로 처음 만났을 때 소년은 열 한두 살쯤이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 취향에 푹 빠졌는데 성인 남성의 소년애(少年愛)도 그리스 문화였습니다. 당시의 그리스 남자들은 미소년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여자는 열등한 존재이므로 그들과는 오직 자식을 낳기 위해서만 잠자리를 같이 했죠. 남자의 구애를 받아들인 소년을 에로메노스(eromenos)라고 했는데 두 사람의 관계는 소년의 10대 후반까지 이어졌습니다.
하드리아누스의 애인인 그리스 미소년 인티노스 대리석상 [사진 위키피디아]

하드리아누스의 애인인 그리스 미소년 안티노스 대리석상 [사진 위키피디아]

하드리아누스는 안티노스를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사자 사냥을 갔을 때 안티노스가 사자와 맞닥뜨리자 황제는 급히 말을 몰아 소년 앞에서 사자를 막아섰다고 합니다. 소년을 자기 목숨처럼 여긴 거지요.

그런 연인이 갑자기 하드리아누스 곁을 떠납니다. 이집트 나일 강 항해 중 강물에 빠져 익사했습니다. 왜 소년이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지만 황제를 위해 자신을 인신공양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50대 중반의 하드리아누스는 건강이 심각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안티노스는 연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리스 소년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죽으면 자신의 나이만큼 그가 더 살게 된다.’ 게다가 소년은 콧수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황제를 떠날 때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우니 생명을 바쳐 그의 수명을 연장시키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황제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녀자처럼 울었다고 합니다. 늙은 사내가 통곡하는 모습은 보기에 처참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황제는 죽은 연인을 위한 추모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칩니다. 우선 소년은 신(神)이 되었습니다. 제국 곳곳에 신격 안티노스를 위한 신전이 건립되었습니다. 고대 로마제국 영토에서 수없이 발견된 안티노스 나체상은 신전에 모셔졌던 것들입니다. 로마인은 신성한 신을 알몸으로 새겼습니다.

신격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꽃이 명명되고, 하늘의 별자리도 소년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추모사업의 핵심은 도시건설이었습니다. 소년이 익사한 곳 부근에 소년의 이름을 딴 도시 안티노폴리스가 건설되었습니다. 도시에서는 소년의 죽음과 황제의 슬픔을 기억하기 위한 전차 경주와 각종 제전이 열렸습니다. 가히 추모 사업에 광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에로메노스 추모사업을 벌이는 데만 골몰했다면 후세 역사가들이 그를 로마의 오현제(五賢帝)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황제라고 평가할 리 만무하겠지요. 사적인 삶은 취향대로 마음껏 누렸지만 제국 관리자의 본분을 하루도 잊지 않고 성실하게 수행한 인물이 하드리아누스였습니다.

타우누스에 게르만족을 방어하는 기지가 남아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의 방어선을 튼튼히 하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전임 트라야누스 황제가 로마의 영토를 최대한 확장했다면 하드리아누스는 필요 없는 부분은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제국의 안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견고한 방어선은 독일뿐 아니라 오늘날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서도 볼 수 있는데 현장을 보면 만리장성을 방불케 합니다.

황제는 수도 로마에 앉아서 명령만 내린 것이 아닙니다. 현장을 직접 방문해서 자신의 눈으로 보고 세밀하게 지시했습니다. 황제는 그런 여행을 제국 전체에 걸쳐 했습니다. 그것을 ‘하드리아누스의 순행(巡行)’이라고 하는데 치세에 두 번 실시했습니다. 그가 다닌 길을 지도에 그려보면 하드리아누스가 얼마나 성실한 제국의 관리자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드리아누스의 순행로. 제국 전체를 빠짐없이 다녔다

하드리아누스의 순행로. 제국 전체를 빠짐없이 다녔다.

황제는 성실했을 뿐 아니라 인간적이었습니다. 로마 시내 공중목욕탕에서 노인이 된 옛 부하병사를 만나자 때 미는 도구를 선물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합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노파가 항의성 민원을 제기하는 것도 끝까지 듣습니다. 병사들을 이끌고 행군할 때는 자기도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걸었습니다. 겸손하고 소통하는 리더쉽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덕분에 로마는 홍시처럼 완숙한 상태에서 쇠퇴의 시작을 최대한 늦출 수 있었습니다.

로마가 2세기를 ‘현제들의 세기’로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적임자가 연속해서 황제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피우스는 자식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인물을 후임자로 선택하고 교육시켜 나랏일을 맡겼습니다. 다음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의 저자로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뛰어난 통치자도 아니었는데, 전임자들과 달리 아들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넘겨주었습니다. 로마의 멸망은 그로부터 시작됩니다.
가을 빛 짙은 타우누스의 로마 유적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2000년 전 제국의 보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하드리아누스와, 이 유적 근처의 승마장을 오가며 온 세상이 자기 것인양 희희낙락하던 모녀. 로마는 하드리아누스와 같은 성실한 관리자가 있었기 때문에 멸망하는 데만 300년이 걸렸습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허악한데 불성실한 관리자 탓에 뿌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는 지도자를 뽑아야 합니다.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