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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27. 그의 태블릿pc를 찾다

중앙일보 2016.11.07 00:01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서....’
 
찬찬히 독백처럼 써 내려갔던 에프의 다이어리는 중간에 급하게 마무리 한 것처럼 문장이 완성되지 않고 끝이 나 있었다. 그 뒤의 몇 장은 찢겨져 있었고 그리곤 바로 뒷장 표지로 이어져 있었다.
급한 마음에 어제 저녁 제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제인과 통화할 수 없었다.
메모 해 놓은 제인의 핸드폰으로 이른 아침 다시 신호음을 보냈다.
 
“읽어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라 생각했어요.”
 
제인은 오늘 오후에나 미술관으로 출근한다면서 다이어리를 잊지 않고 꼭 가지고 나오겠다고 말해 주었다.
 
미술관을 먼저 들러 다이어리를 받으려 했던 내 계획은 다시 아트를 먼저 만나는 것으로 바뀌었다.
지난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가 직접 쓴 일기를 읽고 또 읽었다. 그의 글씨를 만난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만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 말을 시작하려다 끝낸 마지막 문장과 그 뒤에 찢겨나간 일부... 그리고 2권에 기록 돼 있을 내용이 몹시 궁금했다.
사실 더 궁금한 건 10인치 탭pc에 들어 있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다이어리를 읽기 전엔 탭pc에 저장 돼 있을 어떤 것들이 그저 막연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에프가 거기에 저장해놓은 것들이 무엇이든 그의 죽음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할거란 생각이 들었다.
 
파리의 지하철은 친절하지가 않다. 서울이나 도쿄처럼 도착하는 역마다 안내를 해주지 않는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지나는 역을 하나하나 관찰해야 원하는 곳에 내릴 수 있다.
지하철 문도 직접 빗장을 열거나 단추를 눌러야 오픈되었다. 어느 노선 어느 역도 친절하게 저절로 여닫히는 곳은 없었다.
 
파리의 지하철은 깜깜한 지하에서도 위쪽의 창문은 열고 달리기가 일쑤다. 그렇게 몇 코스만 지나면 덜컹거림과 굉음에 시달려 머리가 아득해졌다. 도무지 호텔에서 부터 오페라 역에 도착할 때 까지 사색할 정신적 공간을 전혀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위대한 예술가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정말 색다른 놀라움일 수 밖에 없었다.
 
역에서 밖으로 나오니 세월을 그대로 품고 있는 듯한 건물들이 사위에 늘어서 있었다.
 
“머리가 얼얼하죠?”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것 같아 근처 카페를 찾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못 들은 척 하고는 마음에 드는 카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트가 따라 걸어왔다.
 
“대신 이곳은 역과 역 사이 간격이 짧아요. 그래서 지상에선 몇 걸음만 걸으면 바로 지하철역이 나타나죠. 그리고 차와 차 시간 간격도 짧아서 기다리는 일도 잘 없어요.... ”
 
아트는 내가 찾아든 카페로 따라 들어오며 마치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난 소요를 다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카페는 오페라역 광장이 한 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나는 밖의 광경을 즐길 수 있는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주변의 백화점 때문인지 이른 시간이었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커피를 마셔야겠죠?”
 
아트는 메뉴판을 펼치더니 직원을 불러 에스프레소와 스트로베리 와플을 시켰다. 직원을 대하는 태도나 가벼운 회화가 조금의 어색함 없이 능숙해 보였다. 그 역시 에프처럼 프랑스 방문이 잦은 모양이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 게 있어요?”
 
날라져 온 커피를 내 앞으로 놓아주며 아트가 말했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건물 풍경에 시선을 던져놓고 한참 그러고 있었다.
 
“건물들이 참.. 깊어 보여서요.”
 
내 말을 듣고 아트도 광장에 세워진 오래된 건물들을 하나하나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뭐가 깊어 보인다는 건지 제대로 만들어진 문장이 아님에도 아트는 중간에 생략된 말을 짐작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몰랐던 걸 알게 되더라구요. 그게 긍정의 힘이겠죠?”
 
그는 자신의 말대로 상당히 긍정적인 사람인 건 사실이었다. 이제껏 무엇을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의사를 표현한 기억이 없었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가 나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침착하고 진지한 그리고 담백한 눈빛이었다.
 
“모르죠... 나 자신도 모를 수도 있어요. 뭘 표현하려고 했는지.... 그냥 마냥 깊어보였으니까....”
 
차분한 눈빛이 다시 내 시선을 훑고 지나갔다.
 
“역사..? 시간..? 아니면 이야기...? 였겠죠...”
 
단정하는 말투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건물이 지니고 온 역사.. 혹은 시간, 세월에 얽힌 이야기들.. 그런 게 깊어보였다고 말했던 것 같았다.
 
“사람도 그렇게 깊어지는 것 같아요... 시간이라는 것과 함께 말이에요. 에이징 된다고 해야 하나? 스스로 홀로... 혹은 또 누군가와 함께.... ”
 
그가 덧붙였다. 마치, 내가 오래된 건물들을 올려다보며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가져왔다.
 
“얼마나... 아세요?”
 
내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답이었다.
 
“조금요...”
 
너무 빠른 대답이라 내가 먼저 놀랐다.
 
“뭘 묻는지 어떻게 아시고...”
 
“현수형 얘기...아닌가요?... 알면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고 싶지 않아서.. 아.. 그런데 내 답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더 놀랐겠군요..”
 
아트는 조금 미안한 듯 눈을 찡긋하고 웃었다.
 
“그분이 제 이야기 한 적이 있었나요? ”
 
“네... 많이요...”
 
“제가 참 부도덕한 사람으로 보이셨겠네요... ”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관점으로 사람을 판단할 건 아니죠. 잘 알지도 못하는데....”
 
“저는 의원님만 만난 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도 있었어요. 지금도 그렇고... ”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한 건 처음이었다. 쥬디에게 에프와의 관계를 털어놓을 때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트에겐 다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치 이 순간은 이미 이 세상에는 없는 에프를 향해 하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한 오라기도 진실이 아닌 건 말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내 눈에 시선을 고정해놓고 움직이지 않았다.
 
“알아요...”
 
이번에도 놀란 건 나였다. 그걸 어떻게... 내가 묻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현수형이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갑자기 숨이 막혔다. 그리고 눈앞이 아득해져왔다. 에프가... 어떻게 에프가 그걸 알고 있었다는 것인지...
 
“의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다행이라고 하셨죠.. 늘 함께 할 수 없어 많이 외로울 거라고... 다른 사람들이라도 곁에 머무니 덜 힘들거라고.....”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뛰쳐나갔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외로워서도 아니고 에프 한사람으로 충족할 수 없어서도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었다.
아트가 조용히 내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가볍게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형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자기 사랑에 큰 가치를 뒀고 그 사랑을 고귀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만큼 미주씨를 깊게 믿었고 사랑했다는 거겠죠....”
 
“영원히 그렇게 아시겠네요. 제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이... 제가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했는지 모르시고... 저는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있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울컥 울음이 나왔다.
 
기사 이미지
“왜 몰라요... 다 알죠.... 죽음의 세상과 삶의 세상이 분리돼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의 끈에 매달린 양끝의 매듭과 같아요. 결국은 하나면서 결론은 다른 국면이 되는...”
 
“얼마나 제가 바보같이 보였을까요. 그리고 많이 미웠겠죠... ”
 
“정말 깊게 좋아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늘 미안해 하셨어요. 아시잖아요. 현수형에게 제일 중요한 고향 같은 의미셨다는 거... 형이 만들고 싶은 세상도 고향처럼 편하고 따뜻한 세상이었으니까..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다 주고 싶었을 거예요. 미주씨한테...”
 
“아버지 때문이었어요, 변명 같지만... 한 사람에게 온전히 저를 내어줄 수 없었어요. 아버지는 자신을 다 던지는 엄마를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고... 상처받고 싶지 않았어요.”
 
한 번도 누구에게 이렇게 말 해 본 적은 없었다. 에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미주씨 이해합니다. 미주씨가 잘못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 알면서도 한 번도 제게 내색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내게 물어봐주기라도 했다면 내 마음을 말씀 드릴 수 있었을 건데.... ”
 
나는 에프에게 말할 수 없었던 것까지 그에게 모든 걸 다 설명하고 싶어졌다. 에프와 내가 서로 좋아하면서도 내가 또 다른 남자들을 만나왔던 이유에 대해... 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에프를 속이고 기만한 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형은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갔으니 다 알고 계시겠죠. 그러니까.. 너무 힘들게 생각하지 말아요.”
 
“어디에도 마음을 치우치지 않고 모두에게 스스로 공평할 자신이 있었어요. 아무에게도 저를 다 내어주지 않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어차피 저는 사랑 따위는 믿지 않았으니까요.”
 
“그랬군요.... 그런데... 그게 가능했나요?”
 
언제 피워 물었는지 모르게 이미 다 짧게 타버린 담배 불을 끄며 그가 말했다.
 
“의원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
 
“이런 생각 해봤어요?”
 
그가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
 
“미주씨한텐 n분의 1이지만 그 상대에겐 전부 일 수도 있다는 생각.. ”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나를 떠난 더블도 그랬고... 튜즈도... 그리고 엠도... 쥬디도 그랬다... 나는... 내가 상처 받지 않는 것만 중요했지 상대의 상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없어요... 하지만 거기엔 좀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해요....”
 
말하려는데 내 핸드폰 벨이 울렸다. 달리 미술관이었다.
 
“반미주씨?”
 
제인이었다.
 
“관장님 일정이 취소되셔서 지금 이쪽으로 오시고 계신대요. 미주씨도 어서 오세요.”
 
생각보다 빨리 탭 pc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화번호... 주세요. 제가 전화 드릴게요.”
 
처음이었다. 아트에게 내가 먼저 어떤 요구를 한 건.
아트는 내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는 가 싶더니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제 번호 같은 건 의미 없을 거예요.”
 
아트는 택시를 잡아주고는 또 그렇게 훌쩍 가버리고 말았다.
미술관 앞에서 다다르자 제인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곧 도착하신대요. 그전에 이거...”
 
제인이 내민 건 내가 아침에 전화해서 가져다 달라고 했던 에프의 두 번째 다이어리였다. 제인은 내가 그걸 당장 읽고 싶어 할 거라 생각했는지 사무실 소파에 앉혀놓곤 자리를 피했다.
 
다이어리 노트는 첫 번째와 거의 같았다. 비슷하게 얇은데다 특별한 특징은 없었다.
이번엔 날짜나 숫자 그 어떤 것도 없이 몇 줄의 문장만 메모돼 있었다.
 
 
‘내게 현실은 어디서 어디까지 일까. 내게 환상은 어디서 어디까지 일까. 나는 결국 되돌아 갈 수 없는 길을 건너고 말았다.
내 꿈을 지키려 그렇게 애를 써주었던 그녀에게 나는 면목이 없다. 짧은 순간의 판단이었다. 그게 고비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것만 뛰어넘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땐 그게 내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나는 알겠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다리를 건너와 버린 것이다. 되돌아 갈 수 있을까... 되돌아 갈 수 있을까... ’
 
 
.......
언제 쓰여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인의 말로는 이 노트는 올해 5월 방문 때 덧붙여진 것이라 했지만 그것만으론 정확하게 시기를 짐작할 수 없었다.
 
도무지 현실과 환상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뭔지, 건너버린 다리는 뭔지, 내게 왜 면목이 없는지... 머릿속에서 의문만 가득 꼬리를 물었다.
 
누군가 사무실 노크를 했다.
키가 아주 큰, 프랑스남자가 들어왔다. 그의 한 손엔 작은 가방이 들려져 있었다. 옆엔 제인이 함박웃음을 웃으며 함께 따라 들어왔다.
 
제인이 그를 죠르쥬라고 소개하지 않아도 그가 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에프의 친구이며 달리미술관의 관장인...
 
그는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제인이 전에 전화로 그랬던 것처럼 그의 말을 통역했다.
만나서 반갑다고.. 그리고 에프의 죽음은 가슴 아픈 일이라고... 제인이 일일이 통역하지 않아도 조르쥬의 표정만으로 그의 감정이 그대로 내게 전해져왔다.

그는 작은 가방을 내게 주었다. 그리고 그윽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무슨 말인가를 했다.

“이제야 자신의 할 일을 다 해서 기쁘다네요.”
 
제인이 얼른 그의 말을 내게 전달해주었다. 그와 가벼운 포옹을 했다. 그가 내게 전해 준 10인치 탭pc가 든 가방을 손에 꼭 쥐고서.... 그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의 좋은 친구여서 감사합니다.... 마음으로... 조르쥬에게 말했다.
 
▶ 제8요일의 남자 더 보기
#1. 화요일의 남자, 튜즈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3. ‘당신의 어둠 속에 나도’
#4. “그날,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것”
#5. 엠, 월요일을 싫어하는 남자
#6. 어떤 고백
#7. 한 잎의 여자
#8. 당신은 어디 있나요?
#9. 그 여자 미주 -내 이름은 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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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말할 수 없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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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기억의 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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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왜 하필 장현수야?
#16. JEAN이라는 남자.
#17. 미로 속 그물
#18. 이별은 언제나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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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당신은 누구세요?
#21. 에메랄드 목걸이
#22. 나의 고독
#23. 우연과 필연의 거리
#24. 파리의 하늘 밑
#25. 시녀들
#26. 에프.. 당신의 기록

<목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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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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