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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 17-수묵산수화와 선의 미학

중앙일보 2016.11.06 11:24

예술은 시대와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철학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대정신을 이끌어 갑니다. 산수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은 노장사상입니다. 유교가 규범을 중시하고 예절을 강조하는 생활 철학이라면 노장사상, 도교는 현실을 관조하는 은자의 철학입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형이상학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노장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상선약수(上善若水)입니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의 무위자연은 인위적인 절제나 가식과 위선에서 벗어나 본래 자기모습대로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삶을 말합니다. 상선약수는 노자의 말로 ‘으뜸 되는 선(善)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항상 낮을 곳을 향해 흐르는 물은 겸손의 미덕을 보여줍니다.
 
선사상 반영된 ‘비움의 미학’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의 선종도 산수화의 정신을 더욱 살찌게 했습니다. 선종은 명상수련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중시합니다. 불교의 선(禪)은 노장사상과 결합하면서 중국적인 색을 드러냅니다. 문자가 중심이 되는 경전보다는 체험적 직관에 무게를 둡니다. 선사상이 반영된 산수화는 ‘비움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비움은 사색과 명상의 공간이 됩니다.

중국 명나라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인 동기창(1555~1636)은 선종에서 말하는 깨우침, 즉 돈오의 미학을 산수화에 접목하려 했습니다. 그는 먼저 산수화를 남종화와 북종화로 분류했습니다. 남종화는 수묵산수화에서 보듯이 간결하고 서정적이며 주관성이 강합니다. 북종화는 채색산수화가 주종을 이루며 정교한 자연주의 화풍을 말합니다.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린 남종화는 화원화가가 주축인 북종화에 비해 기교는 떨어지지만 그림에 담긴 정신을 중시합니다.

그런데 동기창의 ‘남북종론’은 선종의 2대 분파인 혜능의 남종선(南宗禪)과 신수의 북종선(北宗禪)에서 따온 말입니다. 남종과 북종은 수행 방법을 달리합니다. 남종선은 일순간에 문득 깨닫는 돈오(頓悟)를, 북종선은 순서를 밟아 수행해 점차 높은 단계의 경지로 나아가 깨달음에 이른다는 점수(漸修)를 중시합니다. 문인화가와 화원화가의 수련 방법과도 닮은 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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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선이 중국 불교의 중심이 되면서 산수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돈오의 깨달음이 화제(畵題)로 올랐습니다. 현실에서 초탈한 맑고 순수한 정신세계를 그림에 반영하려 했습니다. 이는 조선후기 문인화가들에게도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사진1)’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추사는 백파스님에게 귀의해 선불교에 깊이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추사는 난초를 그린 뒤 제문을 붙였습니다. ‘난초 꽃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만에 뜻하지 않게 참모습(性中天)이 드러났다. 문을 닫고 마음 깊은 곳을 찾아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의 불이선이다(不作蘭花二十年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불이선은 ‘인식과 세계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일컫는 말입니다. 한자 성중천(性中天)은 정확한 번역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직역하면 ‘마음 속의 하늘’이지만 성리학적으로 ‘참모습’으로 번역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는 난초에 대한 ‘추상과 심상’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객관적으로 보는 난과 주관적으로 느끼는 난은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확신에 찬 깨우침을 ‘불이선’에 비유한 것이지요. 그림을 보며 스스로 흡족해 하는 추사의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이미지로 나타나는 ‘깨달음의 미학’을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조선후기의 화가 신위(1769-1845)는 “화가가 그림에 깊이 빠져드는 것은 선가에서의 그 오묘한 깨달음과 같고, 이러한 깨달음의 세계는 형태나 채색을 공교하게 잘 그려서 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의 저자 박석은 예술에 투영된 선종의 미학을 소박미·단순미·평담미로 정리합니다. 그러면서 ‘염화미소(拈花微笑)’를 예로 듭니다. 선종의 기원은 꽃과 미소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석가모니가 설법 중에 연꽃 한 송이를 보여줍니다. 아무도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습니다. 말 없이 이심전심으로 불법을 전한 것입니다. 염화미소에는 선종의 심미관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종교적 깨달음에 대한 형식치고는 담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합니다. 소박하지만 세련되고, 단순하지만 심오한 선종의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불교의 선사상이 가장 잘 표현된 예술장르가 수묵산수화입니다. 선 중심의 단순한 구도와 먹의 농담만으로 넓고 깊은 선(禪)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조선후기 김정희, 최북, 전기의 수묵산수화는 붓질이 즉흥적이고 거침이 없습니다. 졸박하지만 ‘문득 깨닫는다’는 돈오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

선(禪)은 오늘날에도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예술의 주제로 등장합니다. 사진에서 선의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사진가로 마이클 케냐를 꼽습니다. 그는 수묵산수화풍의 사진을 미니멀리즘이라는 예술형식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케냐의 풍경사진의 구성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러나 맑고 그윽한 선의 세계를 연출합니다. 흑백 필름을 이용해 대부분 1초 이상의 장노출로 찍습니다. 흔들리는 것은 사라지고 고정된 것만 남아있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경지가 느껴집니다.

배병우의 소나무도 ‘돈오’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경주 삼릉의 소나무를 즐겨 찍습니다. 무덤 주변에 심는 소나무를 도리솔이라고 합니다. 도리솔은 땅과 하늘, 삶과 죽음을 잇습니다. 사진가는 이른 새벽 뿌연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시간에 사진을 찍습니다.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곡선과 흑백의 그라데이션으로 삶과 죽음의 변주곡을 연주합니다. 큰 울림이 있습니다. 가슴 서늘한 깨우침을 줍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

돈오의 철학은 일상에서의 각성을 중시합니다. 깨달음을 체험한 선사들의 기록을 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가 깨닫고, 닭 우는 소리에 깨닫고, 마당 쓸다가 깨닫습니다. 필자도 비슷한 영적 체험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송광사에서 들렀습니다. 이른 새벽 노스님이 예불을 드리러 대웅전으로 들어섭니다. 깜깜한 어둠에 싸인 산사는 고요하고 적막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스님이 대웅전 문을 엽니다. 불빛이 밖으로 새 나옵니다. ‘삐거덕’하는 문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거의 무아지경에서 셔터를 눌렀습니다(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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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브레송은 “평생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을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대 사진가의 회고에서 불교적 깨달음을 봅니다. 온 마음을 다해 찍는 사진의 순간 역시 돈오와 같은 깨달음의 순간이 아닐까요.

글 · 사진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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