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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응답하라, 박 대통령

중앙일보 2016.11.03 19:49 종합 3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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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정치부 기자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본관에 입성하기 위해선 돌계단 11개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지상보다 높은 곳에 다다르면 시야에 들어오는 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다. 가로 약 1m, 세로 3m 대리석에 아로새겨 정중앙에 배치한 탓에 고개를 들어 우러러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용은 이렇다.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치(표준어는 ‘서슴지’ )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묻는다. 박 대통령의 “신앙”은 “조국” 아닌 최순실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는 이 시점에, 아버지 말대로 떳떳할 수 있는가. 대통령의 무책임한 침묵 속에 답은 오리무중이다. JTBC 보도 이후 12일째에 접어들건만 박 대통령의 육성 반응은 지난달 25일의 어정쩡한 100초 사과가 전부였다. 오늘 오전 예정된 대국민 담화에 한가닥 희망을 건다. 그간 전대미문의 아수라장 속에서 대통령의 침묵을 견뎌야 하는 국민은 화가 나고 애가 탔다. 그런데도 “나라를 위해 냉정을 지켜달라”(정연국 청와대 대변인) “외롭고 슬픈 우리 대통령님 도와주세요”(김재원 전 청와대 정무수석)는 말이 나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외롭고 슬픈 건 국민이고, 그 원인 제공자는 박 대통령 아닌가. 이 와중에 부끄러움까지도 국민의 몫이 됐다. 외신은 “연속극에나 나올 얘기”라며 비웃고, 일본인 지인은 “(최순실이 먹었다는) 곰탕을 맛보고 싶으니 식당을 추천해달라”는 카톡을 보낸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도 평양 주석궁에서 웃고 있을 터다.

좌우를 막론하고 5100만 국민 모두가 화병에 걸릴 지경이니, 이번 사태는 대한민국의 숙원인 국민 대통합까지도 이뤄냈다.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바랐으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이들의 분노 역시 뜨겁다. 분노의 동력은 배신감이다. 장막 뒤에 숨어서 깜짝 불통 개각이나 할 때가 아니다. 국민의 분노를 직시하고 감당하는 의지를 보여야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셈이다.

배신이 얼마나 아픈지는 박 대통령 본인도 잘 안다. 지난해 6월 25일, 박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치의 본령은 국민의 삶을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국민의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구태정치는 이제 끝을 내야 한다.” 그 말대로다. 떳떳하게 이 상황을 끝내지 못한다면, 참 나쁜 대통령이다.

전수진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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