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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빨리빨리가 박수받는 시대는 갔다

중앙일보 2016.11.03 01:00 경제 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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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일할 때다. 다니던 회사의 옆 건물은 제너럴일렉트릭(GE)의 본사였다. 언뜻 봐도 외관이 아름다워 보였는데 건축학적으로도 유명한 건물이라고 했다. 첫 출근을 하던 날 우연히 사람들이 건물의 외벽에 매달려 벽을 열심히 닦고 있는 모습을 봤다. 그땐 몰랐지만 내가 약 20년간 출근할 때마다 보게 될 장면이었다. 눈에 띄진 않지만 그들은 그렇게 매일 조금씩 건물의 외벽을 닦아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나도 느끼게 됐다. 이 건물이 원래 이런 색이었구나.

한국, 짧은 기간 경이적 경제성장
당장 성과에 집착하는 조급증 남겨
주식투자도 단기간 큰 수익 기대
위기 극복할 장기 비전 필요할 때


뉴욕과 뉴저지를 잇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George Washington Bridge)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대단한 뉴스는 아니고, 어느 회사가 다리를 새로 칠하는 사업에 뛰어들어 낙찰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회사 이름이나 계약 금액보다 더 눈길을 끈 건 바로 10년이라는 사업 기간이었다. 다리 하나 칠하는데 10년이라니. 의아했지만, 기사를 끝까지 읽어본 뒤엔 납득할 수 있었다. 안전 점검을 병행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내용이었다. 색칠이든 점검이든 한국이라면 과연 10년을 여기에 투자했을까?

지난 60년간 한국 이뤄낸 경제 발전은 세계의 부러움을 살 만한 경이적인 업적이다. 새삼 언급하지 않아도 뒤에서 세는 편이 빨랐던 나라가 이렇게 짧은 기간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건 유례가 없다. 영광스런 역사지만 이 ‘단기’라는 키워드가 지금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 사회 곳곳에 이미 조급하게 생각하는 습관,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는 습관이 배어있다.

나의 전공인 주식 투자에서도 한국인의 조급함이 잘 드러난다. 한국의 많은 투자가들은 투자를 단기적인 주식 가격을 예측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런 장기투자 철학의 부재는 잦은 매매를 관성화하고, 손실 가능성을 높인다. 투자 관점 자체도 다르다. 대부분의 미국인이 주식 투자의 목적을 물어볼 때 ‘노후 준비’라고 답하는 반면 한국인은 ‘목돈 마련’이라고 말한다. 단기간에 큰 수익을 내겠다는 기대가 담긴 발언이다. 반대로 주식 투자를 노후의 관점에서 보지 않기 때문에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도 많다. 한국 가계의 금융 자산 비중이 낮은 이유다. 그러나 낭비를 줄이고 매일 조금씩 주식이나 기타 자산에 투자한 사람이 노후 준비에도 성공한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돼 있다.

주식뿐만 아니다. 한국은 많은 사회적 난제에 직면해 있다. 고령화와 저출산, 청년들의 취업난, 가계부채 등 어느 한 가지도 간단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들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문제가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는데 하루, 일주일, 한 달에 급급하다 보니 다가올 어둠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이제라도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한국이 국가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에 자금과 인력을 투입해야 한다. 크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금융업의 성장이다. 금융업은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지만 고용 효과는 크다. 이를 잘 활용해 장기적인 그림을 그리고, 금융업을 육성해야 한다. 그러려면 금융회사의 수장 역시 자주 바뀌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10년 뒤, 20년 뒤를 준비할 수 있다. 둘째, 창업 정신이다. 우수한 인력이 취업이 아닌 창업을 선택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당장 창업을 장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교육을 바꿔야 한다. 시험 성적에 연연하는 현재의 방식으론 절대 창업가를 양성하지 못한다. 여전히 학생을 성적으로 줄 세우는 평가 방식에 엄청난 사교육비가 투입된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하다. 부모는 노후 자금을 깼는데 자녀는 취업을 못했다. 이게 지금 한국의 현실이다. 진정한 교육은 학생 개개인이 저마다 다른 능력을 관심 분야에서 극대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제도 하나 바꾸고 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틀을 흔들어야 한다.

단기적인 해법은 효과도 단기적이다. 주어진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려면 무엇이 문제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나서 법·규정·절차의 미비점을 개선해야 한다. 당연히 시간이 걸린다. 무엇보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미 속도의 시대는 갔다. 단기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장기적인 비전을 가진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이 대명제를 체화(體化)하지 못하면 한국의 위기 극복도 어렵다.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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