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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소는 누가 키우나

중앙일보 2016.11.03 00:24 종합 3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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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디지털 담당

#1. 오후에만 한강 다리를 일곱 번 건넜다. 2004년 3월 12일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행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된 날 일이다. 다행히 그때 우리에겐 관리에 능한 총리와 위기에 강한 부총리가 있었다. 고건 전 총리는 “경제는 부총리가 중심”이라고 단칼에 교통정리를 했다. 탄핵 의결 후 2시간 반 만에 기자들 앞에 선 부총리는 “경제 정책은 바뀔 게 없다”고 말했다. 성명은 딱 500자였다. 군더더기 없이 짧게 정리가 됐기에 안심이 됐다. 금융 사장단 회의, 경제 5단체장 회동이 이어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때 그들도 준비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치 준비된 듯 움직였다.

그 시점에도 여의도 정가는 전쟁터였고, 광화문은 촛불로 타올랐다. 그러나 그때도 누군가는 일을 했다. 그 덕에 대통령이 없는 2개월 동안 한국 경제는 거뜬했다. 엊그제 조선업 구조조정안이 나왔다. 맹탕이자 퉁 치기였다. 2일에는 황교안 총리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나오지 않았다. 김병준씨든 누구든 후임이 일을 하기 전까지 그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게 국무위원의 의무다. 누구든 해야 할 나랏일이 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해야 한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그런 일이 모인 게 시스템이다. 최순실이 공직자의 핑곗거리가 돼선 안 된다.

#2. 이 전 부총리는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생각하면 내가 386들과 각이 지기 시작한 건 탄핵 정국 때부터였다. “대통령이 없어도 경제는 끄떡없다”고 외치고 다녔으니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 측근 그룹의 섭섭한 마음은 이해가 되고 남는다. 그러나 비상 대응기의 자기 부정, 자기 잠식이 없었다면 상황은 더 꼬였을 게 뻔하다.

사례는 차고 넘친다. 코닥은 디지털 카메라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잘나가는 필름 사업에 영향을 줄까 개발을 주저했다. 반면 넷플릭스는 온라인 비디오 서비스로 성장했다. 원래 넷플릭스는 DVD 대여 업체다. 온라인 비디오가 늘면 DVD 대여는 쪼그라든다. 넷플릭스는 이런 자기 잠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연일 소리만 치고 있다. ‘비선’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데 특별히 공헌한 것도 없으면서 말이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듯한 정부·여당을 후려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론 안 된다. 소도 키워야 한다. 차라리 식물 상태가 된 정부 대신 서민 경제는 우리가 챙기겠다고 선언할 순 없을까. 민주당에 나라 살림 챙기기는 자기 잠식으로 인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일’을 했다간 박근혜 정부를 돕는 꼴이 될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정치적 기회를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다시 상기하자면, 자기 잠식을 두려워했던 코닥은 망했다. 그 반대인 넷플릭스는 승승장구 중이다. 그리고 다시 상기하자면, 지난 대선은 원래 야당에 유리한 판이었다. 판을 못 살린 건 야당이었다.

김영훈 디지털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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