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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 <40> 대만의 천등 마을, 기찻길 옆 카페

중앙일보 2016.11.0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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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시선이 지나는 옛 탄광마을 스펀 풍경. [타이완관광청]


요즘처럼 이른 겨울 추위가 옷깃을 파고들면, 따뜻한 섬나라 대만이 그리워진다. 11월은 참 대만을 여행하기 좋은 달이다. 남부는 물론 북부 타이베이도 20도를 웃도는 포근한 날씨가 이어진다. 가을 재킷 하나 걸쳐 입고 빈티지한 거리를 걷기 그만이다.

고즈넉한 풍경 속으로 스며들고 싶을 땐 핑시선 기차에 몸을 실어도 좋다. 핑시선은 루이팡에서 스펀, 핑시를 지나 징통까지 옛 탄광 마을을 오가는 관광 열차다. 알록달록한 천등과 꽃 그림으로 꾸민 열차가 1920년대 석탄 수송을 위해 만든 구불구불한 철로 위를 달린다. 덜컹덜컹 느리게 달리며 여행의 속도마저 늦춰 버린다. 열차가 플랫폼에 멈춰 설 때마다 소박한 마을이 펼쳐진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노래가 막 떠오르는 풍경이다.

기차가 지나간 철로 위로 색색의 천등이 유유히 날아오른다. 천등에는 중국어, 영어, 한글 등 각 나라말로 붓글씨가 쓰여 있다. 여기가 바로 1년 365일 천등에 소원을 담아 날린다는 천등 마을, 스펀이다. 선로를 따라 천등 가게가 오밀조밀 늘어서 있다. 마치 철로 위에 집들을 심어놓은 듯하다. 기찻길 위에 사람들은 열차가 지나갈 땐 뒤로 물러섰다가, 철로가 비면 다시 우르르 모여 천등을 날리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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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펀에서 한 커플이 소원을 꼭꼭 눌러 적은 천등을 날리고 있다.


가까이서 보면 1m가 넘는 커다란 천등은 대나무나 철사 틀 위에 얇은 종이를 붙여 만든다. 4면의 종이에 소원을 쓴 후 밑 틀 중간에 놓긴 기름종이에 불을 붙이면 열기구처럼 떠오른다. 그렇게 날아 오른 천등은 평균 15분 정도 하늘을 난다. 뭣보다 천등 날리기의 묘미는 빌고 싶은 소원에 따라 다른 색을 선택하는 거다. 초록색은 길운, 다홍색은 인연운, 노란색은 금전과 재물운, 주황색은 애정과 결혼운 등 색깔별로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소원을 적는 사람들의 표정도 볼거리다. 

본래 천등은 마을에 도적이 들었을 때 피신하거나, 도적이 떠난 후 마을로 돌아오라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시간이 흘러, 정월대보름 경축 의식에 쓰이며 천등에 소원을 담아 날리게 됐다. 매년 정월대보름엔 ‘핑시 천등 축제’가 열리는 데 이를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세계 최고의 축제 중 하나로 꼽으며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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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갓진 핑시의 골목을 거니는 여행자들.


핑시선을 처음 타고 스펀에 간 날, 난 혼자였다. 처음엔 커플이나 가족들이 천등을 날리는 모습이 예뻐 신이 났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도 흐뭇했으니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허전했다. 여행지에선 혼밥도, 혼술도 거리낌이 없지만 혼등(혼자 날리는 천등)은 어쩐지 어색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혼자 거대한 등을 날리는 이는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기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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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징통의 마을 분위기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핑시역을 나서자 언덕 아래로 소담스런 골목이 이어졌다. 스펀 만큼 천등가게가 철로 옆에 몰려있지 않고, 골목 안에 흩어져 있었다. 한갓진 골목을 타박타박 걸었다. 골목 안 모습은 과거로 시간을 돌려놓은 듯 소박했다. 그러다 개울 위 다리에서 천등을 날리는 이들과 마주쳤다. 두둥실 하늘로 떠오른 천등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때론 그저 누군가의 바람이 이뤄지길 바라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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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석탄 공장 건물 안을 카페로 바꾼 탄창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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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창카페 창 너머로 내려다본 징통역.


핑시선의 종착역, 징통은 탄광지대였던 흔적이 더 많이 남아있다. 1929년에 지은 목조 기차역, 옛 탄광을 엿볼 수 있는 석탄 생활관 등 볼거리가 많다. 징통 역 건너편 옛 석탄 공장을 개조한 ‘탄창카페’도 있다. 호기심에 찾아간 탄창카페는 텅 비어 있었다. 천등이 그려진 벽화와 책걸상 같은 테이블이 어느 학교에 온 듯 정겨웠다. 창 너머론 정차한 핑시선 기차와 철로 위에서 천등을 날리는 사람들이 내려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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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여행의 비타민이 되어준 바다소금 커피.


텅 빈 카페에서 두리번두리번, 어디선가 주인장이 나타났다. 중국어로 가득한 메뉴를 내미는 그에게 추천을 부탁하자 ‘바다소금 커피’를 권했다. 옛 탄광마을에서 마시는 바다소금 커피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대체 무슨 맛이냐 되물었다. 카페 라테에 대만산 바다소금을 넣어 달콤한 풍미를 더 해준다고 했다. 창가에 앉아 철로 위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바다소금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소금 탓인지 기분 탓인지 참 달콤했다. 낯선 시골 마을을 헤매다 굳어진 몸과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듯 했다. 그렇게 한잔의 커피는 나 홀로 여행에 기운을 불어 넣어준 묘약이 돼 주었다.

그 후로 핑시 선을 2번이나 더 탔다. 친구들과 손뼉을 치며 스펀에서 천등을 날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11월이면 천등이 날아오르던 핑시의 파란 하늘과 징통의 바다소금 커피의 맛이 먼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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