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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view &] 껍데기는 가라 2

중앙일보 2016.10.27 01:00 경제 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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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경제기획부장

‘뜬금없이 웬 껍데기 타령이냐고? 요즘 돌아가는 품을 보니 여기저기 ‘껍데기’가 보여서 하는 말이다. 대선이 양자구도로 좁혀지면서 후보들의 말본새가 거칠어졌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대한민국은 여전히 나아갈 것이다. 그동안 해오던 관성의 힘이 있고, 어찌 됐든 굴러가는 시스템의 힘이 있으며, 그간의 경험으로 높아진 국민의 눈높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한 방에 훅 갈 만큼 간단한 대한민국이 아니다. 외려 누가 대한민국호(號)의 조타수가 되더라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거리만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을지가 더 고민이다.’

대한민국은 나아가고 있는가
국가 시스템은 작동하고 있나
국민 눈높이는 많이 높아졌나
4년 전 칼럼을 고쳐 씁니다


지난 대선 직전인 2012년 11월30일 본지(노트북을 열며)에 ‘껍데기는 가라’는 제목으로 썼던 칼럼의 일부다. 최근 최순실씨의 총체적 국정개입 의혹을 보면서 놀랐고 참담했다. 칼럼을 다시 읽으니, 고쳐쓰고 싶은 부분이 제법 됐다. 대한민국은 진짜 전진할 수 있는 것인가. 누가 조타수를 잡든 굴러가는 시스템의 힘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이걸 감시하고 압박할 수 있는 국민의 눈높이는 어디쯤인가. 이 글은 4년 전 칼럼에 대한 A/S다.

누가 대통령이 되던 적어도 경제는 관성의 힘으로 어느 정도 굴러갈 수 있다고 낙관했다. 경제부처를 출입하면서 정책이 만들어지고 실행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청와대, 혹은 장관이 일단 결심하면 일사불란하게 총력전을 펼치는 공무원들을 보며 탄복했다. 아, 저런 게 바로 시스템의 힘이구나 생각했다. 정치권이나 청와대의 ‘정무적 판단’에 무리한 정책이 나오거나 잘 벼려진 정책이 두루뭉수리로 바뀌면 함께 안타까워했다.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 시장경제의 근본을 흔들어서는 안 되지만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으로 봐야 한다는 어느 장관의 현실론에 공감했다.

하지만 정치는 경제가 어쩔 수 없이 치러야할 비용, 그 이상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은 지금 대통령의 반대로 좌초됐다. 둘로 쪼개진 행정의 비효율을 거론하는 건 이제 입이 아플 정도다. 경제발전의 주역이자 시스템의 주축인 공무원 사회는 유능한 인재풀이 빠져나가며 흔들리고 있다. 시스템을 가장 크게 흔든 게 바로 대통령이다. 비선(秘線) 실세가 개입해 쑥대밭이 된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 새벽 출근해 대통령의 메시지를 다듬었던 청와대 공무원들,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세종시 공무원들은 ‘주군(主君)’의 일탈에 어떤 생각이 들까. 경제부처의 어느 국장은 “모두 멘붕(멘탈 붕괴) 상태”라고 했다. 이럴 때 경제부총리라도 나서서 경제장관들을 비상소집하고 ‘경제는 경제, 흔들리지 말고 가자’는 메시지를 던지며 리더십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그런 소식조차 들리지 않는다. 작동 불능의 시스템은 도처에 있다.

시민사회와 시장은 충분히 성숙했을까. 최순실 사태로 개헌 여론이 단박에 위축됐다. 제안자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한과 책임을 일치하게 해서 행정부의 효율을 높이고 국회의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개혁해야 정치비용을 줄일 수 있다. 대통령이 마음에 안든다고 우리 시대의 큰 숙제마저 포기할 순 없다.

시장의 강력한 플레이어인 대기업들은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에 거액을 기부했다. 문제가 터지자 기업이 권력의 심기를 어찌 감히 거스를 수 있겠느냐는 동정론도 나온다. 동의하지 않는다. 뒤늦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기업 중에는 면밀히 주판알을 튕겨서 재단 설립뿐만 아니라 권력의 입맛에 맞는 이벤트를 열어 줄대기에 나선 곳도 없지 않으리라. 어쩌면 촉수가 남다른 몇몇 대기업은 언론보다 먼저 무소불위한 비선 실세의 존재를 감지했을 것이다. 돈의 힘으로 제 뜻대로 권력을 포획하려 한 이런 기업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같은 것은 유행 따라 하는 화장발에 불과할지 모른다.

지난 칼럼에서는 선거용으로 무리하게 나온 여야의 공약을 ‘껍데기’라고 썼다. 2016년 오늘, 키질해서 까불러야 할 껍데기가 너무 많다. 고(故) 신동엽 시인의 아사달 아사녀처럼 우리 모두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부끄럼 빛내며/맞절” 할 수 있는 날은 대체 언제쯤일까.

서경호 경제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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