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대통령이 물꼬 튼 개헌, 국회가 주도하라

중앙일보 2016.10.24 19:18 종합 30면 지면보기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20대 국회 첫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현행 5년 단임제 헌법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됐다. 정부 내에 헌법 개정을 위한 조직을 설치해 국민의 여망을 담은 개헌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국회도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국민 여론을 수렴하고 개헌의 범위와 내용을 논의해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박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많은 국민이 의아해하고 있다. 하지만 개헌론 자체는 대한민국의 백년대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행 5년 단임제는 대통령 무책임제
여야 간 큰 틀 합의로 대선 전 개헌을
박 대통령, 개입 말고 환경 조성만 하길

1987년 개정돼 30년째 한국 사회의 운영체계로 작동해 온 지금의 10차 헌법은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현행 헌법은 “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을 외치며 숱한 희생을 치러 얻어낸 시민의 헌법이다. 그렇지만 지금 헌법에 내재한 치명적 문제점과 급변하는 시대 변천에 따라 헌법을 전면적으로 손질해야 할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현행 헌법의 치명성은 선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5년 단임제’에 있다. 이 조항은 대통령이 재임 시 쌓았던 실적에 대해 국민이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대통령 무책임제로 귀결됐다. 대통령은 차기 대선에서 재신임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할 동기를 상실함으로써 시간이 흐르면서 국민·정치권과 피드백은 끊기고 완고한 제왕적 통치자로 타락하곤 했다. 제왕적 대통령이 강화됨으로써 증오와 적대의 여야 대결이 심화되고 분열 구조가 뿌리내렸으며 협치(協治)는 사라졌다. 무엇보다 5년 단임제 권력구조에서 정부가 국가의 영속성을 의식한 장기 미래비전을 세우는 게 불가능했다. 이런 헌법상의 결함이 민주화 30년 기간 중 거의 예외 없이 실패한 대통령을 양산한 주요 원인이었다. 현재 300명의 국회의원 중 ‘개헌 추진 국회의원 모임’에 여야를 가리지 않고 193명의 의원이 참여하고 있는 현실이 개헌의 불가피성을 웅변한다. 김형오(18대 국회)·강창희(19대) 국회의장 시절 각각 많은 예산과 전문적 인력을 들여 중립적 입장에서 포괄적이며 세부적인 개헌안을 마련해 놓은 만큼 여야 간 큰 틀의 합의만 이뤄지면 내년 대선 전 개헌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개헌론에 스며든 정치성이다. 박 대통령의 어제 연설은 정부가 주도하는 개헌론을 강조하고 있지만 안 될 말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이나 87년 ‘민주화 운동’은 국민과 국회가 주도하는 개헌만이 성공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80년엔 3김씨가 주장한 국회 주도 개헌론과 최규하 대통령의 정부 주도 개헌론이 충돌함으로써 전두환 세력의 전면 등장 명분만 제공했다. 반면에 87년엔 전두환 정부가 주도권을 상실하고 1노3김의 국회가 개헌을 주도함으로써 신속한 민주화가 이뤄졌다. 박 대통령은 개헌의 물꼬를 트고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만족하고 일정·절차·주체·내용 등은 전적으로 국회에 맡기는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 쓸데없는 오해와 갈등을 피하고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