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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오디세이 2016 참가자 릴레이 기고 <10> 연해주를 돌아 평양 가는 길을 찾다

중앙일보 2016.10.24 00:22 종합 29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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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

만주·연해주로 돌아 평양 가도
평화 이루자는 오디세이의 꿈
경의선과 동해선 다시 열려야
만주·연해주 활용 시너지 생겨

전 통일부 장관

지난 8월 8일부터 13일까지 중앙일보 주최 ‘평화 오디세이 2016’의 일원으로 연해주에 다녀왔다.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하바롭스크뿐 아니라 북·중·러 국경도시인 하산도 간다기에 기꺼이 참여했다. 북한에서 러시아로 가는 기차가 두만강 철교를 건너 맨 처음 서는 곳이 하산이다. 그동안 서너 번 중국 팡촨(防川)에서 철조망 너머로 바라보기만 했던 하산 땅을 직접 밟아보는 건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오디세이는 고대 그리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에 참가한 뒤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가 기다리고 있는 이타카로 곧장 돌아오지 못하고 먼 길을 돌아오는 10년 동안 겪은 시련과 모험을 그린 서사시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시작된 ‘평화 오디세이’는 상징성이 크다. 서울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이 막힌 상황에서 만주나 연해주를 돌아서라도 마침내 평양으로 가서 남북이 다시 평화를 노래하고자 하는 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연해주로 가는 비행기는 오디세우스의 배처럼 좀 멀리 돌았다.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2시간30분이 걸렸다. 북한 상공을 통과할 때는 두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비행기로 30분이면 먼 길이고 평양은 부산보다 가깝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내려 시내로 들어가는 동안 먼 길을 돌아온 이유를 곱씹어 봤다. 아무래도 평양으로 갈 수 있는 빠른 길이 혹시 연해주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 여행이 갑자기 탐험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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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나선과 러시아 하산을 잇는 두만강 하구의 북·러 철교. 다리 오른쪽이 북한이다. ‘평화 오디세이 2015’ 당시 사진.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금년 초부터 4차 북핵 실험, 개성공단 폐쇄, 중국 북한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 계속되는 북 미사일 발사, 사드(THAAD) 배치 발표 등 사건이 끊이지 않으면서 남북관계가 날로 악화되었다. 8월 초부터는 북·중 국경지대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고 한다. 그 여파로 러시아 당국이 우리 일행의 국경도시 하산 방문을 불허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크라스키노라는 도시의 언덕 위 전망대에 올라 산 너머 있다는 하산을 아스라이 바라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두만강 너머 북한 마을도 중국 팡촨도 안 보였다. 하산에 못 가서 섭섭했지만 남북관계가 악화된 탓이라고 생각하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위성사진에 찍힌 한반도 비무장지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동·서 두 줄기 평화의 고속도로(Peace Expressway)는 감동적이었다.” 2005년 10월 25일 서울에서 한국 기자들을 만난 콜린 파월 당시 미 국무장관이 한 말이다. 2002년 9월 재착공된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공사 중 도로 공사는 2004년, 철도 공사는 2005년에 끝났다. 동쪽 도로는 금강산 관광길이 되었고, 서쪽 도로는 개성공단 출퇴근길로 쓰였다.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는 2007년 5월 시험운행 후 노무현 정부 말까지 비정기적으로나마 기차가 남북을 오갔다. ‘평화의 고속도로’가 이명박 정부 이후에도 계속 쓰였더라면 이번에 우리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나진·선봉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기차로 남북을 왕래하고 유럽까지 가기 위해 북한에 자재·장비를 줘 가면서 연결해 놓은 동·서 두 줄기 철길이 8년 넘게 쓰이지 않아 이제는 녹슬고 잡초에 묻혀 있을 걸 생각하니 아쉬움이 밀려 왔다.

그러나 평화 오디세이가 씁쓸함과 아쉬움의 연속만은 아니었다. 50명이나 되는 일행의 다양성 때문에 소득도 컸다. 소설가, 기업인, 교수, 전문가, 정치인, 변호사, 언론인, 전직 관료 등 다양한 전공과 경력의 소유자들이 만나서 5박6일이나 어울리다 보니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 같았다. 먼 길을 돌긴 했지만 북한 땅을 훌쩍 건너뛰어 연해주로 가서 두만강을 건너 평양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그동안 휴전선만 넘으려고 했지 연해주나 만주를 돌아 평양으로 갈 생각은 왜 못했던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됐다.

앞으로 언제든 남북관계가 복원되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가동이 재개되면 그런 남북협력 사업들이 또다시 중단되지 않을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할 텐데, 연해주나 만주를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예컨대 남·북·중, 남·북·러, 남·북·중·러 등 다국적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도 거기에다 연계시켜 운영하는 것이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이것도 평양으로 곧장 가는 길이 다시 열려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연해주를 돌아 평양으로 가는 길을 찾으면서도 ‘평화의 고속도로’가 다시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래서 더 간절했다.

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전 통일부 장관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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