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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결과 승복? 그때 가봐서” 불붙는 대선 불복 논란

중앙일보 2016.10.21 01:55 종합 10면 지면보기
채병건 특파원 네바다대 현장 르포
미국과 각국 기자 수백여 명이 미국 대선의 마지막 TV 토론을 지켜보던 19일(현지시간)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네바다대학 프레스룸. 이곳에서 갑자기 “와” 하는 탄성이 터졌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 결과에 승복할지를 묻는 질문에 “그 때 가서 말하겠다”고 답하는 순간이었다. 트럼프는 진행자가 같은 질문을 다시 하자 똑같이 반복했다. 트럼프는 그간 선거 조작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수천만 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무대에서 대선 불복 가능성을 공개 거론하자 미국 언론들은 충격을 드러냈다. 보스턴글러브는 “트럼프가 (대선 승복의) 전통을 깼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트럼프가 마지막 토론에서 미국 민주주의 자체를 모욕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정말 지저분한 여자” 공격에
클린턴 “내가 빈라덴 공격 지켜볼 때
당신은 연예방송 진행하고 있었다”
트럼프를 ‘푸틴의 꼭두각시’ 비유도
시작하고 끝날 때 서로 악수 안 해

이날까지 나온 각종 주별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지도에는 파란 색이 점점 늘어간다. 클린턴을 지지하는 주다. 위기에 몰린 트럼프는 결국 대선을 20일 앞둔 이날 수천만명이 지켜보는 마지막 무대에서 집토끼 전략을 극단으로 확장시켰다. 철저하게 지지층을 자극해 결집하려는 의도가 깔린 폭탄성 답변을 던졌다. 대선 불복 가능성을 알리는 것은 자폭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마지막 무대에서도 선거의 상식을 깼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은 즉각 “소름이 끼친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끌어내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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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현지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대선후보 3차 TV토론이 끝난 뒤 힐러리 클린턴(앞쪽)이 청중들 쪽으로 걸어와 손을 흔들고 있다. 뒤는 노트를 안주머니에 넣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AP·로이터=뉴시스·뉴스1]

3차 토론의 시작은 차분했다. 낙태 질문을 놓곤 예상대로 트럼프는 반대를, 클린턴은 여성의 선택권을 강조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정제된 공방을 오래 끌지 않았다. 클린턴을 “거짓말쟁이로 확인됐다”고 비난하더니 “클린턴은 중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대선 출마를 허용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중범죄자로 지칭했다.

4시간 전 토론장으로 향할 때 탔던 우버의 운전사 조셉은 “클린턴은 권력에 굶주린(power-hungry) 거짓말쟁이”라며 “클린턴이 이기겠지만 나는 트럼프를 찍을 것”이라고 말했다. “십수년전 성희롱을 당했으면 그때 고소했어야지 느닷없이 왜 지금 당했다는 여자들이 나오나”라고도 비난했다. 그는 백인 남성이다. 트럼프는 지지층의 분노를 공식 토론장에서 확대재생산했다. 트럼프는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성들에 대해 “클린턴이 이들을 나서게 했다”며 음모론을 제기했다. 토론 후반부엔 분을 참지 못한 듯 사회보장제도를 설명하고 있던 클린턴을 향해 “정말 지저분한 여자(Such a nasty woman)”라며 막말의 정점을 찍었다.

클린턴도 물러서지 않았다. 클린턴은 지난주부터 유세 일정을 중단한 뒤 토론 준비에 올인했다. 20일엔 뉴욕에서 6시간을 토론회 연습에 투자했다. 이를 통해 준비해온 역공 카드 중 하나가 ‘30년 경력’ 비교다.

▶클린턴=“트럼프가 30년 경험을 꺼냈는데 간단히 말하겠다. 1970년대 내가 흑인 어린이들의 차별 반대에 나섰을 때 트럼프는 입주자 인종 차별(흑인 입주 반대)로 법무부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트럼프=(끼어들며)“나도 말하겠다.”

▶클린턴=(무시하며)“내가 백악관 상황실에서 오사마 빈라덴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 공격하던 걸 모니터하던 날 당신은 (TV 프로그램인)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를 진행하고 있었다. 당신의 30년과 비교할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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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장에 온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가운데)와 공화당 경선 후보였던 벤 카슨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왼쪽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이복 형 말리크 오바마. [AP·로이터=뉴시스·뉴스1]

클린턴은 러시아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세우려 민주당 및 자신과 관련된 e메일을 해킹해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을 (트럼프와 같은) 꼭두각시로 만들려 한다”고 공격했다. 클린턴은 “이곳 라스베이가스에 있는 트럼프 호텔은 중국산 철강을 썼다”며 “(트럼프의 블루 칼라 구애는) 악어의 눈물”이라고도 비난했다. 예상대로 트럼프가 클린턴재단의 고액 후원금을 문제 삼자 “트럼프재단은 돈을 받아서 6피트(183cm) 짜리 트럼프 초상화를 샀다”며 “우리 재단은 후원금의 90%를 전세계와 미국을 돕는데 썼다”고 반박했다.

토론장에 들어서며 악수를 나누지 않았던 클린턴과 트럼프는 이날 총기 규제, 증세, 경기 부양, 대통령 자질 등 전분야에서 부닥쳤다. 동맹을 놓곤 트럼프는 “우리는 다른 나라로부터 뜯기고 있다”는 주장을 반복했던 트럼프는 ‘한국’을 네 차례나 거론했다. 동맹파 클린턴은 이를 즉각 반박했다. 클린턴은 “미국은 동맹을 통해 평화를 유지해 왔다”며 동맹은 미국의 안전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두 사람은 90분의 설전이 끝난 후에도 역시 악수를 나누지 않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클린턴은 곧바로 청중석으로 내려가 크게 웃으며 지지자들을 응대했다. 반면 트럼프는 연단 위에 남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내 멜라니아, 딸 이방카 등 가족이 다가가 함께 얘기를 나누다 트럼프도 뒤늦게 청중석으로 내려갔다. 토론장을 떠날 때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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