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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프라다 가방 빌려드려요, 패션도 공유경제

중앙일보 2016.10.21 01:14 종합 21면 지면보기
“입을 게 없다”는 한국 직장여성들 옷장은 늘 옷으로 꽉 차 있다. 회사원 정혜윤(30)씨는 화이트 셔츠만 여섯 벌이나 된다. 막상 꺼내 입자면 뭔가 유행에 뒤처진 듯해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감하게 버리지도 못한다. ‘언젠가 입겠지’라는 생각 때문이다.

‘패션 렌털’ 국내 서비스 본격화
SK플래닛·롯데백화점 사업 시작
일상복부터 명품 가방, 귀금속까지
에어비앤비처럼 필요할 때만 대여
가성비 따지는 신세대에 잘 맞아
“패션 소비 바꾸는 새로운 도전”
집·차처럼 취향 맞춰 고르긴 힘들어

‘성인 여성의 사장(되는) 의복 현황과 의류 폐기 원인 조사’(2013)에 따르면 국내 성인 여성이 보유한 평균 옷의 양은 70.9벌. 그중 6개월 동안 착용하는 건 44.4벌뿐이다. 외국도 마찬가지다. 독일 그린피스는 2015년 “옷장에 보관한 옷의 40%는 거의 입지 않거나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샀는데 입지 않고, 입지 않는데 버리지 않는 옷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옷을 보관할 공간이 한없이 넓다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 대부분 이처럼 입지도 않는 옷에 치여 사느라 스트레스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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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트 더 런웨이’에서 빌릴 수 있는 케이트 스페이드 드레스.

이런 사람을 겨냥해 옷을 빌려 주는 ‘패션 렌털’ 사업이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지난달 23일 SK플래닛은 월정액(8만원)을 내면 최대 네 벌까지 빌려주는 ‘프로젝트 앤’ 사업을 시작했고, 앞서 7월 롯데백화점은 고가 드레스나 정장, 귀금속 등을 갖춘 패션 렌털 매장 ‘살롱 드 샬롯’을 열었다. 그동안엔 소규모 개인 사업자가 한복·웨딩드레스 등 목적성 옷을 빌려주는 게 전부였지만 대기업과 백화점이 뛰어들어 일상복까지 다루는 것이다. 이제 옷도 음악이나 영화처럼 굳이 소유하지 않고 그때그때 바로 즐기는 ‘패션 스트리밍’ 시대가 도래하는 것일까.

국내에서는 패션 렌털 서비스가 생소하지만 미국·유럽 등에서는 온라인 기반으로 이미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2009년 하버드 경영대학원 출신들이 창업한 렌트 더 런웨이(Rent the Runway)가 대표적이다. 마크 제이콥스, 토리 버치 등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의 드레스를 빌려주는 서비스로, 현재 550만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월 139달러(약 15만8000원)를 내면 한 회당 세 벌씩 무제한으로 바꿔가며 대여 가능하다. 아무나 살 수 없는 고가의 옷을 누구나 입어볼 수 있다는 의미로 업계에서는 럭셔리 패션의 넷플릭스(영화·드라마 스트리밍 서비스업체)라 부르기도 한다. 이를 본뜬 걸미츠드레스(Girl Meets Dress)와 웨어투데이곤투모로(Wear Today Gone Tomorrow) 같은 온라인 대여 업체도 성업 중이다.

여러 업체가 뛰어들다 보니 특화 서비스로 승부하는 곳도 눈에 띈다. 사이즈가 큰 옷(Gwynnie Bee), 임부복(Borrow For Your Bump), 럭셔리 핸드백(Avelle) 등 대여 제품을 전문화하는 것이다. 또 업체가 고른 제품을 무작위 배송하는 구독 서비스와 결합한 대여도 있다. 르 토트(Le Tote)는 월 59달러(약 6만 6000원)만 내면 옷 세 벌과 액세서리 2개를 신청자의 기호에 맞춰 골라 보내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론 교환할 수 있다. 일본의 에어 클로짓(Air Closet)도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패션 렌털을 공유 개념으로 전환한 업체도 등장했다. 기존 서비스가 비싼 옷을 사느니 차라리 빌려 입는 ‘가성비’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사업 모델은 ‘공유’가 핵심이다. 즉 내게 당장 필요하지 않는 옷을 남에게 제공하는 식이다. 랑테뷰(Rentez-Vous)가 대표적으로, 패션의 에어비앤비(숙박 공유 서비스업체)를 표방한다. 옷을 빌려주고 빌려 입는 이들이 직거래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을 제공하고, 중개 수수료를 받아 수익을 올린다. 미즈 컬렉션(The Ms.Collection)도 소비자 간 대여 시스템을 기반으로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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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앤’에서 대여 중인 프라다 백팩(왼쪽)과 발렌티노 가르바니 핸드백.

‘프로젝트 앤’을 기획한 SK플래닛 김민정 상무는 “사지 말고 (빌려) 쓰자는 사업 모토처럼 패션의 소비 형태를 바꾸는 도전”이라고 설명했다. 패션업계 관계자들은 ‘나올 게 나왔다’라는 반응이다. 렌털에 거부감이 적은 젊은 소비 계층, 즉 ‘밀레니얼 세대’(1980~2004년 출생자)가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통할 만한 서비스라고 보기 때문이다.

트렌드 분석기관 PFIN 도진수 과장도 “소유보다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패션 렌털은 가성비 높은 재미를 준다”고 말한다. 이 세대는 값비싼 집과 차를 사서 자산을 과시하기보다 개성 있는 중고품을 사거나 서로 쓰던 물건을 교환하는 것을 더 ‘있어 보인다’고 느낀다는 얘기다. 부모 세대에 비해 살 능력이 떨어지는 비소유자들(NOwners)에게 합리적 가격의 대여는 소비의 대안이 되기에 충분하다. 디지털이라는 놀이터가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인터넷 매체 비즈니스 오브 패션(BOF)은 밀레니얼 세대를 ‘SNS에 자신들의 모습을 늘 업데이트하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주머니는 얇지만 옷차림은 계속 바뀌어야 하는 존재인 만큼 패션 렌털이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하나 더. 최근 사회 트렌드 역시 패션 렌털에 우호적이다. 서울대 전미영(소비트렌드학) 교수는 미니멀 라이프와 친환경이라는 키워드를 꼽는다. ‘필요 없는 물건을 정리하고 단순하게 살자’는 라이프스타일이 인기를 끌면서 과도한 소유에 부담감을 느끼는 이가 많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생각보다 어머어마한 양을 버리게 되면서 물건을 신중하게 사야 한다는 걸 피부로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SPA 브랜드가 늘어나면서 2014년 한 해 동안 국내 의류 폐기물은 7만4360t으로, 2008년에 비해 32%가 늘었다(환경부).

물론 빌려 입는 패션이 꼭 장밋빛 전망인 건 아니다. 패션의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차와 집처럼 그간 인기를 끈 공유 상품들은 선택 시 고려 대상이 별로 많지 않았다. 크기나 면적, 기능 등이 가격과 맞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패션은 품목·색깔·소재·사이즈·디자인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는, 그야말로 무한대의 다양성이 있다. 성균관대 황선진(의상학과) 교수는 “선택의 폭이 넓은 만큼 불만족스러울 가능성이 크다”면서 “결정하고 교환하면서 쓰는 시간과 에너지를 고려하면 결국 소비자의 외면을 받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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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택배 등 인프라 구축도 난제다. 우버(차량 공유 서비스)나 에어비앤비는 사용자를 연결하는 소프트웨어만 제공하면 되는 반면, 패션은 결국 실물이 오가야 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패션 렌털 서비스를 1년 만에 접은 ‘원투웨어’ 김조은 대표도 여기에 동의한다. “의복 구매부터 창고 대여, 택배까지 제대로 갖추려면 거대한 자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경험을 털어놓았다.

패션 렌털 사업은 이미 진행하고 있는 패션 시장 양극화를 보다 극단적으로 심화시킬 수도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무난하면서도 오래 두고 입을 만한 고급 브랜드와 면 티셔츠, 레깅스처럼 싼값에 자주 입는 아이템에만 지갑을 열 게 뻔하기 때문이다. 트렌드 분석업체 트렌드랩506 이정민 대표는 “패션 스트리밍은 사기에도, 입기에도 부담스러운 물건을 소비하는 방법일 뿐”이라고 말했다.

패션업계든, 소비자든 소유와 공유의 줄타기는 이미 시작됐다.

이도은 기자 lee.do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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