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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걸어갈래요,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중앙일보 2016.10.2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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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경(22)이 달라졌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기대와 관심을 버거워하던 심은경은 이제 없다. 오히려 연기를 통해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며 부담감마저 훌훌 벗어던진 듯하다. 올해 출연한 영화가 네 편, 개봉 앞둔 영화는 무려 다섯 편이다. 누구보다 바쁘게 지내는 동안, 어지러운 마음을 다듬고 뒤엉킨 생각을 정리한 그의 심지는 더 단단해졌다. 이러한 심은경의 변화는 올해 선보인 영화들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목소리 연기로 주목받은 ‘로봇, 소리’(1월 27일 개봉, 이호재 감독)와 ‘서울역’(8월 17일 개봉, 연상호 감독)부터 스릴러 장르에 도전한 ‘널 기다리며’(3월 10일, 모홍진 감독), 얼굴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부산행’(7월 20일 개봉, 연상호 감독)까지. 그는 영화 규모나 역할 비중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로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가고 있다. 이번에는 저예산 독립영화 ‘걷기왕’(10월 20일 개봉, 백승화 감독)으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무조건 ‘빨리’ 혹은 무조건 ‘열심히’만 강요하는 세상에서 ‘느리게 걸어도, 남들과 달라도 괜찮다’고 말하는 영화다. “‘무리해서 뛰지 않고 천천히 걸어도, 충분히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 마치 나를 위한 위로 같았어요. 여유로워지라고, 편안하게 살아도 괜찮다고요.” 심은경은 오래도록 곱씹은 생각들을 천천히 털어놓았다.

‘걷기왕’ 심은경

네 살 때 발견된 ‘선천적 멀미증후군’으로 인해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는 만복(심은경). 그는 날마다 오직 두 다리로 왕복 네 시간 거리를 걸어서 통학한다. 걷느라 바닥난 체력은 수업 시간에 잠으로 채우기 일쑤. ‘꿈과 열정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세상에서도 만복은 천하태평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남다른 걷기 능력을 알게 된 담임 선생님(김새벽) 추천으로 육상부에 들어가 경보를 시작한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만복에게 ‘잘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긴다.

고달픈 청춘을 위로하는 ‘걷기왕’은 심은경의 해사한 매력이 가득 담긴 영화다. 자신과 똑 닮은 캐릭터를 연기했기에 극 중에서 더욱 빛나는 건 물론이다. 인터뷰 말미, 심은경에게 “만복이 잘 살고 있겠죠?” 하고 물었다. 만복처럼 해맑게 웃으며 그는 “행복하게 잘 살아갈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마치 만복이 직접 “나, 잘 살고 있어요”라고 답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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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만복을 보면, 누구나 학창 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것 같아요.
“그런 점 때문에 ‘걷기왕’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만복이랑 많이 닮았거든요. 선천적 멀미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성격이 무척 비슷해요. 낙천적이고, 밝고, 잠도 많죠. 저 역시 학창 시절을 평범하고 재미있게 보냈어요.”

-아역 배우로 활동하며 TV에 자주 나왔는데도 평범한 생활이 가능했나요.
“친구들과 다른 점은, 어려서부터 배우로 활동한 것뿐이었어요. 그걸 제외하면 여느 10대와 다를 바 없었죠. 아마 제가 TV에 나오는 걸 몰랐던 친구들도 많을 거예요. 설사 안다고 해도, 처음에만 신기해 했어요. 저는 학교에 자주 나갔고, 별로 다르게 행동하지도 않았거든요. 그렇다 보니 주변의 특별한 관심도 그리 오래가지 않더라고요.”

-‘걷기왕’에서 굉장히 즐겁게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 기운이 스크린 밖에서도 느껴질 정도였어요.
“제가 먼저 공감했으니까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으며 그 나이에 했던 걱정들이 떠올랐어요. 그맘때 저는 ‘연기를 계속해야 하나, 나중에 어떤 어른이 될까’ 고민이 많았거든요. ‘걷기왕’은 10대 친구들에게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응원과 위로를 건네는 영화예요. 저도 그 시절을 똑같이 거쳤으니, 그 좋은 메시지를 관객에게 잘 전달하고 싶어요.”

-고등학생 역할이 부담스럽지 않았나요. 아역 이미지를 벗으려 노력해 왔을 텐데요.
“시나리오를 보기 전에 제일 고민했던 부분이죠. 여전히 ‘아역 배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고, 저의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아직도 ‘고등학생 같다’라는 말을 자주 들어요. 성인이 된 후 ‘어떻게 해야 배우로서 더 발전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죠. 그러면서 학생 역할은 자연스레 기피하게 됐고요.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를 만나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군요.
“마음가짐이 크게 바뀌었어요. ‘걷기왕’이 앞으로의 배우 생활에 터닝 포인트가 될 것 같아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다가 이런 생각이 번쩍 들더라고요. ‘작품마다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실 ‘학생 역할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거죠. 지금 고등학생 역을 맡는다고 해서, 아역 이미지에서 덜 벗어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이번에 다시 10대로 돌아가니 좋았어요. 당시 경험을 떠올리며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었거든요. ‘써니’(2011, 강형철 감독)를 찍을 때보다 10대의 심리가 더욱 잘 이해되던데요?”

-학창 시절 경험이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나 봐요.
“경험의 힘이죠. 이 영화를 찍으며 경험의 소중함을 깨달았어요. 돈 주고도 살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죠. 10대에 10대를 연기하는 것과 20대에 10대를 연기하는 것은 정말 다르더라고요. 시간이 흐르고 나니 지나온 시절을 더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었어요. 그 덕분에 ‘만복’이라는 아이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됐어요.”

-만복은 선천적 멀미증후군 때문에 왕복 네 시간을 걸어서 통학해요. 그러니 ‘걷기’를 잘할 수밖에요. 실제로도 걷는 것을 좋아하나요.

“걷는 것은 좋아하는데, 오래 걷지는 못해요. 만복과 달리 저는 체력이 별로 좋지 않거든요(웃음). 그 아이가 매일 학교까지 걸어 다닌 것처럼 두 시간씩 걷기는 힘들어요.”

-경보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육상부 경보 선수로 나오지만, 초보 선수 역할이라 부담은 덜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초보니까 자세가 조금 어색해도 괜찮았어요(웃음). 극 중 육상부 코치(허정도)는 만복에게 경보 선수가 될 것을 제안해요. 그러자 만복은 ‘경보가 뭐예요?’라고 되묻죠. 저도 그랬어요. 경보가 어떤 운동인지 잘 몰랐어요. 저야 만복이니까 몰라도 괜찮았지만, 수지 역의 박주희 언니는 힘들었을 거예요. 전국 대회에서 1등하는 캐릭터라 경보 자세와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으니까요.”

-흔히 ‘경보’라 하면 웃긴 자세로 걷는 모습을 떠올리잖아요. 실제로는 어땠어요.
“저도 처음에는 많은 분들의 생각처럼 우스꽝스러운 자세만을 떠올렸어요.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 말이죠. 하지만 제대로 배우고 나니 정말 매력적인 운동이더라고요. 특히 자세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규칙을 가진 스포츠예요. 디테일이 중요한 종목이죠. 지면에서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면 바로 실격이에요. 엉덩이도 뒤쪽으로 내밀지 않아요. 다리를 굽히지 않고 걷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죠. 아주 곧은 자세로 걸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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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에서 수지는 만복에게 계속 “목숨 걸고 해야 한다”고 말해요. 이처럼 무언가를 죽을 각오로 해 본 적 있나요.
“만복이 경보에 매달린 것처럼, 제게는 연기뿐이었어요. 이렇게 생각한 적은 있어요. ‘연기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취미가 생기면 연기에 대한 스트레스를 조금 덜 받지 않을까.’ 그래서 이것저것 배워 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어떤 것도 연기할 때만큼 집중되지 않더라고요. 다른 분야를 많이 경험하고 싶고, 도전하고 싶어요. 하지만 아직은 연기 말고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직 심은경에게 연기만큼 흥미로운 일이 없는 거겠죠.
“어린 시절엔 연기하는 게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점점 생각이 많아졌어요. ‘내 방식이 맞는 걸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 사실 연기에는 답이 정해져 있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내 연기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아직까지는 배우로서 배울 것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만복이 죽기 살기로 경보했던 것처럼, 저도 그렇게 연기해야 할 것 같아요.”

-‘로봇, 소리’부터 ‘걷기왕’까지 올해 여러 작품에 출연했어요. 그래서 ‘다작 배우’로 꼽히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주연이든 조연이든 혹은 ‘부산행’처럼 단역이든 마다하지 않으려 해요. 관객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고, 연기하며 스스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역할이라면 무엇이든 말이죠. 역할의 비중은 작품을 선택하는 데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거든요. 올해 ‘다작’을 한 것은, 여러 감독님과 함께 작업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각각의 영화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랐고요. 그저 ‘요즘 심은경이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가 많았나 보다’ 하고 이해해 주세요(웃음).”

-내년에 ‘궁합’(홍창표 감독) ‘조작된 도시’(박광현 감독) ‘특별시민’(박인제 감독)이 개봉해요. 연상호 감독의 차기작인 ‘염력’ 촬영도 시작되죠.
“내년에도 저를 스크린에서 자주 보실 수 있겠네요(웃음). ‘관객 평가가 두렵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죠. 예전에는 많이 두려웠는데, 요즘은 좋은 소리든 싫은 소리든 어떤 말을 들어도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해요. 그냥 이 시간을 즐기려고요.”

이지영 기자 lee.jiyoung2@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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