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석천 논설위원
대통령 주변에는 우연이 꼬리를 무는데
시민들에겐 왜 그 흔한 우연 하나 없나
우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입학 후 수업 불참 등으로 제적 경고를 받았는데 엄마와 함께 학교에 다녀간 뒤 학칙이 개정된다. ‘국제대회·훈련 시 증빙서류를 내면 출석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규정이 소급 적용되면서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과제물을) 다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친절한 e메일까지 보내주는 교수님도 만난다. “우린 수업 빼먹지 않고 들어갔는데….” “교수님이 ‘얘는 이미 F’라고 했잖아요.” 학생들이 억울해해도 소용없다. 대학 측 설명은 한결같다. “특혜는 없었다.” 하긴 성실함이 ‘운발’을 당할 수 있겠나.
대학생만이 아니다. 국회의원도 세렌디피티를 맛볼 수 있다. 선거법 위반으로 여당 의원 11명이 기소됐다. 야당 의원(22명)의 정확히 2분의 1이다. 자로 잰 듯하다. ‘친박’으로 분류된 의원은 단 한 명. 심지어 “(지역구 변경을) 안 하면 사달 난다니까. 내가 별의별 것 다 가지고 있다니까, 형에 대해서”(윤상현 의원)란 발언도 무혐의 처리된다. 검찰과 법무부는 편파 기소 의혹을 부인한다. “소속 정당과 지위를 막론하고 공정하게 처리했다.”
이렇게 우연이 겹치면 수사기관으로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 검찰도 우연의 힘을 믿을 수 있게 됐다. 김주현 대검 차장이 10년 전 빌라를 샀는데 공교롭게도 최근 진경준 전 검사장에게 공짜 주식을 준 혐의로 수사를 받은 넥슨 김정주 창업주의 아버지 소유였다. 김 차장은 국정감사에서 ‘우연의 일치’라며 통장과 매매계약서, 송금 영수증을 들어보였다. 민정수석 처가와 넥슨의 부동산 거래가 진짜 우연이었는지 조사하던 수사팀은 또 한 번의 기막힌 우연에 얼마나 놀랐을까.
신기한 건 대통령과 가깝거나 잘나가는 분들에게만 우연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꼭 필요할 때 ‘우연’이 끼어든다. 시민들의 팍팍한 삶엔 그 흔한 우연 하나 생기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내다팔 강남 부동산도 없고, 주식을 줄 기업인 친구도 없다. 서울경찰청 운전병은 언감생심, 아들 군대 보내면 꼭 전방에 배치된다. 병든 닭처럼 조는 수험생 아들딸을 흔들어 깨우는 게 전부다. “아빠 엄마가 해준 게 뭐냐”고 대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나마 불운이 겹치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경기도 안산, 경남 통영, 전남 광양…. 경기 위축과 취업난 속에 동반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쥐새끼 한마리 나타나지 않는다”(이성복 시 ‘아들에게’)는 절망 때문인가. 지난주 경북 포항의 야산에선 대구 건설업체 간부 두 명이 나란히 숨진 채 발견됐다. 회사 대표가 비리를 저질러놓고 금전적 손해를 보상하라며 자신들을 압박했다는 유서를 남겼다. 장화홍련이 따로 없다. 그들 곁엔 검사 친구, 기자 친구 하나 없었던 것일까.
우연이 거듭되면 운명이 된다고 한다.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대통령 말씀을 믿고 싶다. 대통령 주변 사람들처럼 세렌디피티의 순간이 오지 않는 건 간절함이 없기 때문일까. 운(運)에도 총량이란 게 있어서 누군가 행운을 누리는 만큼 다른 이들은 불운을 나눠 가져야 하는 걸까. 그것도 바람만이 아는 대답일까. 부디 시민들의 지성을 개돼지쯤으로 여기지 않길 원할 뿐이다.
권석천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