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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 “서울은 걷는 길 4겹, 연결 땐 세계 유일무이 도시”

중앙일보 2016.10.17 00:39 종합 2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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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승효상이 ‘빈자의 미학’을 선언한 지 20여년이 지났다. 그는 “족쇄가 되기도 했지만 타협하지 않았다. 더 강한 확신이 든다”고 말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 집은 당신 집이 아닙니다.”

다이내믹한 보행루트 만들 수 있어
걷는 길에 사람 모이고 가게 생겨
산과 조화이룬 고유 풍경도 살려야
건축은 혁명…삶도 시대도 바꿔

집을 짓기 위해 건축가를 만났는데 이런 말을 들었다면 다소 황당할 테다. 내 땅에 내 돈 들여 내 집을 짓겠다는데 내 것이 아니라니. 건축가 승효상(64)의 말이다. 그는 대기업 회장이든, 회장 사모님이든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집에 영향받는 행인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라고 일갈한다. 24년 전 발표한 건축담론 ‘빈자의 미학’은 그런 원리원칙주의자 승효상의 명함과도 같다. ‘빈자의 미학’은 가난할 줄 아는 사람(건축)의 미학이다. 그가 좋은 사례로 꼽는 건축물은 잡지사 ‘샘터’의 사옥이다. 서울 대학로 큰 길가에 있는 이 건물은 꽉 채워 수익을 높이는 대신 1층 한가운데를 비워 행인을 위한 길로 쓰게 했다.

2014년 9월 그가 서울시 1호 총괄 건축가로 선임됐을 때 시는 “총괄건축가를 통해 서울 건축의 정체성을 확보해 600년 수도 서울에 걸맞은 도시와 건축물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지자체장의 성향에 따라 중구난방으로 흘러가던 도시건축 정책을 어떻게 고집스레 잡아갈지 기대가 컸다. 어느덧 2년 임기가 지났다. 승효상은 연임하지 않고 퇴임했다. 때마침 그의 도시건축 에세이집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가 새로 출간됐다. 절판됐던 저서 『빈자의 미학』(느린걸음)도 재출간됐다. 다음달 20일까지 통의동 진화랑에선 주택건축 전시회 ‘열두 집의 거주풍경’도 열린다. 퇴임 후 할 말이 많아진 걸까. “거절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그리 됐다”는 승효상을 14일 동숭동의 사무실 ‘이로재’에서 만났다.
 
총괄건축가 2년 임기는 좀 짧지 않나.
“굉장히 짧다. 다른 도시의 총괄건축가 임기는 4~5년이다. 연임해서 10년까지 하기도 한다. 그래야 도시가 바뀐다. 서울시의 경우 처음 시행하는 제도인데, 제도보다 승효상이 먼저 인식되는 듯 했다. 더 했다가는 나 이후로 이 제도가 없어질 것 같았다. 시장도 무지 말렸지만, 제도가 존속되는 게 더 중요했다. 2대 총괄 건축가인 김영준 건축가(김영준도시건축 대표)가 잘할 거라고 본다.”
서울 도시정책에 가장 필요한 게 뭔가.
“일본 모리재단이 발표한 ‘글로벌 파워 시티 인덱스 2015’에서 경제력·규모·시설 등을 따졌을 때 서울이 6위에 꼽혔다. 동시에 삶의 질을 기준으로 한 컨설팅 그룹 머서 리포트에서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72위였다. 이 불균형은 어디서 온 걸까. 잘못된 도시 정책 탓이다. 산지에 들어선 서울의 고유한 풍경을 회복해야 한다. 랜드마크인 산 아래 작게 조화롭게 모여 이룬 도시가 서울이다. 구호만 외친다고 우리 삶이 바뀌지 않는다. 도시가 바뀌어야 우리 삶이 바뀐다. 프랑스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는 ‘건축이냐, 혁명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건축을 통해 시대가 바뀌는 예는 수없이 많다.”
그러기엔 너무 많이 파괴된 것 아닌가.
“아직도 서울 도성 내 땅을 3~4m만 파면 옛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종로구 공평동의 경우도 도시환경정비사업을 하던 중에 문화재가 쏟아졌다. 땅 밑에 서울의 기억이, 역사도시가 그대로 있다. 아직 지하를 파지 않는 단층 건물들 개발하기 시작하면 흥미진진해질 거다.”
전세계적으로 ‘도시재생’이 화두다.
“세계 건축가들의 특이한 건축물 각축장이던 중국도 방향을 틀었다. 새로 짓기 보다 있던 것을 재생하자는 분위기다. 베이징 올림픽 열면서 옛 건물 엄청나게 없앤 것을 후회하고 있다. 베이징의 경우 구도심에 있는 시청사가 이전하는데 이후 재생작업을 놓고 열 올리고 있다.”
세운상가 공중 보행로, 서울역 고가 공원화 등 정책 대다수가 걷기에 집중된 까닭은.
“보(步)라는 한자는 머물 지(止)자 두 개가 합쳐 생긴 말이다. 머물기 위해 걸어야 한다.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머서 리포트 1위로 꼽힌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는 완벽한 보행도시다. 중앙역과 연결된 간선도로조차 보행로로 바꿔버리니 사람이 몰리고 가게가 생겨났다. 서울은 걷기 위한 길이 네 겹이나 있다. 을지로 지하상가 같은 지하, 지표면, 서울역 고가 같은 공중로, 산길이다. 연결만 잘하면 다이내믹한 루트를 만들 수 있는, 세계 유일무이한 도시가 서울이다.”
그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관통하는 율곡로를 지나던 때였다. 서울시에서는 일제가 만든 이 도로를 지하화하고 기존 도로를 덮어 공원으로 만들 예정이다. 공사 가림막을 본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100년 가까이 쓴 길을 없애는 게 말이 되나요. 저것도 중요한 기억 아닙니까. 베를린이 옛 기억을 잘 간직해 세계적인 성찰의 도시로 꼽히잖아요.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공중다리를 넓게 다시 놓으면 될 일을 몇백억원이나 투입하면서….” 아직도 승효상의 눈에는 서울만 어른거리는 듯했다.
 
건축가 승효상이 걸어온 길
ㆍ1982~89년 공간연구소 대표
ㆍ89년 건축사무소 이로재 오픈
ㆍ93년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자택 ‘수졸당’ 설계
ㆍ96년 저서 『빈자의 미학』 출간
ㆍ2000년 장충동 ‘웰콤시티’ 사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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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2006년 충남 공주 조계종 불교 전통문화센터
ㆍ2009년 경남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ㆍ2014~2016년 서울시 1호 총괄건축가 역임
글=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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