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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아메리칸 드림에 절망한 유권자, ‘적대의 정치’ 불러

중앙선데이 2016.10.16 01:21 501호 6면 지면보기

미국 대선이 3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후보들이 경합 지역에서 유세에 나섰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각각 12일과 14일(현지시간) 네바다 라스베이거스와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서 연설하고 있다. [AP=뉴시스]

1 안병진 부총장은 최근 미 대선 경선을 현장 관찰한 내용을 토대로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메디치)를 출간했다. 2 14일(현지시간) 대선 조기투표가 진행되는 미국 시카고의 투표소에서 유권자에게 주는 팔찌. [시카고 로이터=뉴스1]



당신은 외롭고 자주 화가 나십니까?


클린턴·트럼프 막장 대결, 왜

바로 이 질문이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의 본질이다. 즉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대선이 더 잘 보인다.



홈쇼핑에서 가구를 계속 바꿔보거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외치며 힐링을 해도 왠지 공허하고 우울하다. 결국 피와 살점이 튀기는 파이트 클럽에 가입하고 나서야 비로소 살아 있다는 존재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 동네 아저씨 마초(Macho)들의 클럽은 점차 신용카드 회사 파괴 운동같이 기득권 체제에 대한 분노의 포퓰리즘 운동으로 상승한다. 영화 ‘파이트 클럽’의 줄거리다. 미국판 ‘일베’인 마초주의자 트럼프는 이 영화의 현실 버전인 셈이다. 그는 때로는 유세장에서 노골적으로 폭력을 선동하기도 하고 2차 토론에서는 힐러리를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는 막장 드라마까지 연출했다. 미디어들이 이런 트럼프 발언의 문제를 지적하지만 트럼프 현상은 여전히 건재하다.



왜 그럴까. 트럼프와 지지자들에게 중요한 점은 ‘팩트 체크’가 아니라 ‘분노의 랩’이다. 특히 포스트모던 미디어의 시대에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내 편 선수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케네디와 닉슨의 우아한 대결로 상징되었던 대선 토론이 어쩌다 난투극으로 전락한 걸까. 그간 미국적 가치를 꾸준히 자랑해 온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뉴욕타임스 10월 13일자 글에서 “차라리 전 세계 시청료를 받았으면 대박일 것”이라고 자조적 평을 남기기도 했다.



미국 민주주의 제도는 세계가 선망하는 가장 탁월한 미국의 발명품이었다. 엘리트들이 대표하는 대의제와 큰 선거구에서의 빈번한 선거의 결합이라는 건국 시조들의 아이디어는 지금까지도 최상의 혁신 시스템으로 칭송돼 왔다. 귀족주의 잔재가 남은 유럽과 달리 비주류 아프리칸계 미국인인 오바마를 당선시킨 힘은 여기서 기인한다.



하지만 저질 막말이 난무한 이번 2차 토론은 많은 의문을 떠올리게 한다. 단지 트럼프라는 이단아의 등장만으로 모든 병리 현상의 원인을 돌리는 것으로 충분할까. 혹시 어딘가에서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건 아닐까. 어쩌면 이제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아닐까.



미국 정치의 추락은 세 가지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적대성의 정치’를 만들어낸 경제적·사회적 토양이다. 두 번째는 이 토양에 반응한 공화당의 극단적 변신과 민주당의 무능이다. 세 번째는 건국 시조들이 남긴 발명품 자체에 내재한 결함이 이제 리콜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학력 중년 백인이 사망률 1위]



첫째,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확신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역동적 가능성이 존재하면 인간은 희망을 찾는다. 반면에 긴 터널의 끝이 잘 보이지 않으면 절망적 운동에 호소하게 된다. 진보 진영은 월가(Wall Street) 점령 시위를 통해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에 경고장을 날렸다. 이들이 보기에 자신들의 후보인 오바마가 집권했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바마는 구제금융에 앞장섰고, 2010년의 경우만 하더라도 추가로 창출된 소득의 93%를 상위 1%가 가져갔다. 결국 월가 점령 운동은 이후 샌더스를 내세워 ‘펜실베이니아 애비뉴(백악관) 점령’ 운동으로 전환했다. 민주당 예비경선에서 대돌풍을 일으킨 샌더스는 정확한 의미에서 민주당 인사가 아니다. 샌더스가 보기에 힐러리는 운동 정당의 민주당을 기득권 결탁 정당으로 바꾼 주역이자 미래 가치를 대변하지 않은 낡은 세력이다. 그래서 ‘민주당 접수 운동’에 나선 것이다. 말하자면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더불어민주당 접수 운동을 전개한 셈이라고 할까.



보수 진영의 파이트 클럽은 티파티 운동이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 미 프린스턴대 교수가 분석한 것처럼 약물중독 등으로 인한 백인 중년층의 사망률이 선진국 중 유일하게 상승하고 있다는 지표는 이들의 절망감을 시사한다. 디턴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9~2014년 45~54세 중에서 고졸 이하 백인 사망률은 인구 10만 명당 22%(134명) 증가했다. 같은 기간 대학 교육을 받은 중년 백인들의 사망률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고 중년 흑인·히스패닉계 사망률도 감소 추세였다. 이들의 절망과 분노를 대변하는 티파티 운동은 공화당의 한 분파가 아니다. 말하자면 한국자유총연맹이 새누리당 접수를 시도한 셈이다. 트럼프는 한발 더 나아가 제3당 운동이 공화당 외피를 잠시 빌린 격이다.



인간은 빵만 먹고사는 건 아니다. 따라서 경제적 양극화만이 적대적 정치를 양산하지는 않는다. ‘미국 토박이’들이 중시하는 가치와 삶의 태도가 낡은 것으로 부정되는 상황에 직면할 때 이 분노의 초점은 소수계 이민자를 향해 더욱 타오른다. 미국판 TV조선인 폭스채널을 시청하다 보면 멕시코가 다시 잃어버린 캘리포니아를 찾으러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패널이 진지하게 늘어놓는 걸 볼 수 있다. 과거 새뮤얼 헌팅턴이 예리하게 포착했듯이 지금 백인 남성들은 아프리칸계 미국인만이 아니라 잠자던 거인인 히스패닉이 깨어나자 공포에 몸을 떨고 있다. 이미 캘리포니아에서 변화가 시작됐다. 과거 반(反)이민 운동의 성지였던 이곳은 히스패닉 수가 임계점을 넘어 민주당과 소수계의 가치와 이익이 강력히 지배하는 주로 탈바꿈했다. 21세기 중반이 되면 미국에서 백인이 소수인종이 된다. 트럼프 현상은 결국 과거 좋았던 시절 백인(특히 남성)들이 지배하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들의 절망적 몸부림의 표출인 셈이다.



[공화당 ‘황혼기 보수 정당’ 전락]



두 번째로 중요한 포인트는 공화당이 적극적으로 이 백인 남성의 절망감에 호소하는 ‘황혼기 보수주의 정당’으로 전략적으로 변신했다는 점이다. 토머스 샬러 메릴랜드대 교수에 따르면 그 결정적 분기점은 95년 깅그리치 하원의장의 선거 혁명이다. 깅그리치 이후 공화당은 개혁적 보수주의자들을 거의 다 쫓아내고 백인 집토끼에게 호소하는 강경 보수주의자들의 전투적 운동 정당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의회 장악을 토대로 선거구 조정도 입맛대로 해 강경 보수주의자들은 집토끼만으로 안전하게 당선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점차 공화당 내 예비경선에 참여하는 유권자층도 색깔이 더 보수화돼 본선 유권자층과는 사뭇 다르다. 결국 공화당 지지층과 본선 유권자의 갭은 이들이 국회의원·지방선거에선 승리하고 대선은 계속 놓치는 사이클을 공고히 해버렸다. 거기다 대거 트럼프 지지자층이 공화당 안에 유입돼 버렸다. 걸출한 개혁적 보수주의자이자 ‘미국판 유승민’이랄 수 있는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이제 힘이 없다. 분당과 같이 큰 정계개편의 회오리가 필요하지만 아직 모든 게 불확실하다.



[미국식 선거제도 결함 드러나]



세 번째, 트럼프 현상은 보다 거시적으로 보면 ‘건국의 아버지들’이 디자인한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 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한다는 점이다. 대의제와 큰 선거구에서의 빈번한 선거는 애초 의도와는 달리 실패하고 있다. 엘리트들은 보장된 임기 동안 대의제에서 충분히 민의를 대표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교착 상태를 부르고 있다. 이를 교정해야 할 빈번한 선거는 역동성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를 공격하는 적대적 정치가 선거 후의 적절한 타협을 막고 있다. 선거는 비전과 정책 대결이 아니라 ‘누구를 내 응접실에 초대하고 싶은가’의 매력 자본 경쟁으로 변질됐다. ‘똑똑한 여성’ 엘리트 힐러리보다는 ‘나쁜 남자’ 트럼프가 마초들의 거실이나 ‘로커 룸’에선 더 어울린다. 여기다 건국의 시조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기업국가의 흐름이 금권 선거로 정치를 타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다양한 포퓰리즘을 양산하고 있는데, 트럼프란 백만장자가 아웃사이더를 대변하는 기형적 구도는 ‘백만장자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건국의 시조들이 디자인한 ‘제도’의 결함은 무엇일까. 정치 교착 상태에서는 의회해산권을 보장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점, 기업에 인간처럼 돈으로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게 한 기업국가의 논리도 오류라는 지적이 나온다. 빈번한 선거를 통해 큰 선거구에서 선출된 엘리트가 민의를 잘 반영할 것이라는 매디슨의 논리는 엘리트주의의 한계와 미국식 선거의 부작용을 너무 안이하게 본 것이란 비판에 부닥치고 있다. 또한 헌법 수정의 문턱을 너무 높여 본질적인 것을 건드릴 수 없다는 문제도 지적된다.



결국 요란한 ‘파이트 클럽’ 드라마는 지나갈 것이지만 본질적 변화는 없을 것이다. 중장기적 변화는 결국 미국 인구구성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 뉴밀레니얼 세대(현재 18~29세)와 그들을 대변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른바 ‘알파고 시대’의 새로운 가치와 어젠다들, 이를테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 로봇이 지배하는 기업국가에서 노동은 무엇인가, 인간의 행복은 어떻게 보장되는가와 같은 근본 질문들을 던져 나가고 있다. 건국의 시조들이 설계한 미국 민주주의는 미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또 다른 발명품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병진경희사이버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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