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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겁내지 말아요, 변화와 함께 가세요

중앙선데이 2016.10.16 00:42 501호 16면 지면보기
여자는 나이를 먹어도 마음만은 언제나 소녀라고 한다. 40대 아줌마가 청춘드라마의 로맨틱 판타지에 10대 딸과 함께 열광하게 되는 현실을 체험중이니 팩트 맞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음만은’ 그렇단 얘기다. ‘50대 줄리엣’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알렉산드라 페리(53)가 온다.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나 중 한 명이자 현역 최고령 발레리나이기도 한 그가 유니버설 발레단이 4년 만에 선보이는 ‘로미오와 줄리엣’(10월 22~2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두 차례 선다(23·26일). 엄마나 유모가 아니라 당당히 줄리엣이다. 1984년 영국 로열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에 처음 선 이후 ‘현존 최고의 줄리엣’으로 칭송받아 온 그다.


내한하는 '50대 줄리엣' 알렉산드라 페리

페리의 이번 내한 공연은 그와 동갑인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의 적극 추진으로 성사됐다. ‘50대에 줄리엣을 춤출 수 있다는 것’에 감동했다는 문 단장은 “줄리엣은 오늘날 페리를 있게 한 시그니처 캐릭터”라면서 “젊은 무용수가 표현해낼 수 없는 관록의 무대를 어떻게 보여줄 지 매우 궁금하고 기대된다”고 했다. “50대 줄리엣에게 한계는 없다”는 페리를 e메일로 미리 만났다.



 

지난 6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공연된 ABT의 ‘로미오와 줄리엣’ ⓒRosalie O’Connor



알렉산드라 페리의 이번 무대가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2007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의 ‘로미오와 줄리엣’ 고별무대로 현역을 떠났던 그가 9년만인 지난 6월 다시 같은 무대의 줄리엣으로 컴백했기 때문이다. 두 딸의 엄마에서 소녀로 돌아온 그의 귀환에 세계 무용계의 이목이 쏠렸다. 뉴욕타임스는 “53세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수월한 복귀”라고 대서특필하며 “유연성·유려함·감동적인 움직임은 변함없다. 그녀의 선명하고 열정적이고 충동적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다”고 극찬했다.



‘현역 최고령 발레리나’로 통하지만, ‘역대 최고령 현역’은 아니다. 전설의 발레리나 마고 폰테인은 로열 오페라하우스 공연에서 60세 생일을 자축했고, 미하일 바르시니코프는 68세인 지금도 간간이 무대에 선다. 페리가 특별한 점은 일단 한번 은퇴했었다는 점이다. 두 딸의 어린 시절, 잦은 출장으로 죄책감에 시달렸던 그는 “당시엔 춤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뺏어가는 것 같았고 전처럼 무대 위에서 행복하지 않았다”며 “이제 그만둘 때라고 결론 내렸고, 몇 년은 엄마 역할만으로 만족했다”고 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수년간 ‘자신을 잃어버린 느낌’으로 갈등하다 결국 은퇴 6년만인 2013년 이탈리아 스플레토 페스티벌에서 직접 안무한 ‘윗층의 피아노’로 현역 무용수로 복귀했고, 2015년 로열발레단의 ‘울프 웍스(Wolf Works)’로 올리비에상을 수상했다. 그는 “내 머릿속에 있던 이야기와 욕구들이 합쳐져 점점 더 내가 뭘 하고 싶고 뭘 해야 하는지 뚜렷이 떠올라 안무에 도전하게 됐고, 결국 컴백 공연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했다.



남들은 발레단장 등을 맡아 후배를 양성할 나이에 굳이 현역 복귀한 이유에 대해선 “무대나 박수가 그리웠던 건 아니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그리웠을 뿐”이라고 했다. “나를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으려고 해요. 복귀 후 발레에 대한 열정이 그 어떤 때보다 커졌죠. 비교하지 않고 춤에만 집중할 자유를 얻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6년 만의 복귀를 위해 꼬박 1년간 쉽지 않은 트레이닝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그는 “나이로 인해 극복할 수 없는 육체적 한계는 없다”고 단언했다. “단지 고통이 따를 뿐”이란 것이다. “모든 댄서들이 자기 커리어 중에 쌓이는 작은 부상들 때문에 고통을 겪죠. 그리고 분명히 그 고통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덜해지지 않아요. 그건 한계라기보다 전에 없었던 것들이 나타나는 것이고,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걸 잘 관리하는 거에요. 물리치료를 받는다든지, 운동선수들이 하듯이 자기 몸을 돌봐야 하는 거죠.”



[“내가 할 일은 내 몸을 잘 관리하는 것”]



이탈리아 출신의 페리는 1983년 19세에 영국 로열발레단 최연소 수석무용수에 오른 이래 줄곧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다. 85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초청으로 ABT로 옮겨 22년간 수석무용수로 활약했고, 92년부터 15년간은 라 스칼라의 수석무용수를 겸했다. 그런 그에게 케네스 맥밀란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각별한 의미다. 로열발레단 시절인 84년 맥밀란이 안무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줘 ‘케네스 맥밀란의 뮤즈’로 불리며 스타덤에 올랐기 때문이다,



‘50대 줄리엣’이 가능한 것도 그래서다. ABT 예술감독 캐빈 맥킨지의 권유에 몇 달간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와이 낫(Why not)?’이라고 결론 내렸다. “자신을 심판하기보다, 놀라운 기회를 스스로에 대한 선물로 받아들이기로 했죠. 여러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에서 맥밀란 버전을 가장 사랑하기도 하구요. 가장 드라마틱하거든요. 내 생각에 셰익스피어가 원작에서 표현하고자 한 걸 맥밀란이 발레로 가장 잘 옮긴 것 같아요.”



맥밀란 버전이 사용하는 프로코피예프 음악의 힘도 작품의 중요한 매력으로 꼽았다. “프로코피예프는 정말 놀라운 작곡가거든요. 여기서 마리아 칼라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녀에게 ‘오페라 가수가 어떻게 그리 좋은 배우가 되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거든요. 그녀는 ‘모든 감정이 음악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고 답했는데, 나도 완전 공감하는 바에요. 프로코피예프 음악은 그 음악 자체에 장면마다 각 캐릭터의 감정들이 너무나 잘 녹아 있거든요. 각기 다른 바이브레이션을 연주하고 있는 현악기들이 그 감정들을 잘 표현해내고 있어서, 그냥 음악에 집중하는 것 만으로도 캐릭터의 깊은 감정까지 도달할 수 있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인 2막 머큐쇼의 죽음에서 로미오가 칼을 뽑는 장면이 있어요. 음악에 따라 분노가 점점 커져가며 결국 삭이지 못하고 티볼트를 죽이는 장면인데, 그 음악 자체로 대본을 보듯이 모든 감정이나 상황이 설명이 되는 것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지죠.”



하지만 50대에 10대의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연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터. 그는 연기에 있어 ‘파트너와의 합’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작품이건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의 삶을 살려고 노력해요. 모든 무용수가 그래야 하죠. 진정한 파트너는 진심으로 서로의 감정과 정신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하구요. 대화나 연습을 많이 하지 않아도 무대에서 서로의 감정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는 그런 파트너로 ABT 수석무용수 에르만 코르네호를 택했다. 지난 6월 컴백 무대와 이번 내한 공연도 함께하는 18살 연하의 파트너다. “그를 선택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우리는 서로 감정의 깊이에 있어 아주 친밀감을 느끼는데, 그게 파트너십을 매우 유니크하고 특별하게 만들어주죠. 그래서 나는 다른 누구와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추기를 꿈꾸지 않아요.”

지난 6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공연된 ABT의 ‘로미오와 줄리엣’ ⓒRosalie O’Connor



[“어린 소녀처럼 열정 유지하고파”]



6월 뉴욕 공연 이후 7월 일본, 8월 이탈리아 투어 등 분주한 일정을 소화해온 그는 내년에도 독일 함부르크 발레단과 영국 로열발레단과의 공연 등 꽤 많은 스케줄이 예정돼 있다. 이번 한국 방문은 한국행에 적극성을 보인 페리가 로열발레단 일정을 조율해 어렵사리 성사됐다는 후문이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작품이기에 완벽한 초대라고 생각했고, 전에 한국에서 춤출 기회가 많이 없었기에 꼭 오고 싶었어요.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누가 알겠어요. 아무도 자기 인생 모르는 거니까요. 유니버설발레단이 아주 훌륭한 발레단이라는 걸 알고 있고, 단지 한국에서 공연할 뿐 아니라 한국 무용수들과 이런 만남을 갖고 함께 춤추는 것도 너무 기대가 됩니다.”



44세에 육아를 위해 은퇴했다가 6년 만에 무대로 돌아와 53세의 나이로 줄리엣을 춤추는 페리의 무대는 분명 많은 여성 무용수들에게 좋은 자극으로 작용할 터다. 나이 때문에 은퇴를 고려하는 발레리나들에게 해줄 말이 있느냐고 물으니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삶을 두려워하거나 일을 계속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해요. 절대 일을 포기하거나 자기 몸을 훈련시키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거죠. 변화를 겁내지 말아요. 몸이나 정신의 변화를 겁내지 말고 변화와 함께 가면 됩니다. 중요한 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신이 속해 있는 순간의 진실을 찾는 일이에요.”



그는 “언제까지 춤출지는 알 수 없고 그저 순간을 살고 있다”며 “복귀 후 무용수로서 갖게 된 새로운 꿈도 없고, 안무가로 전향할 계획도 없다”고 했다. “난 절대 계획을 세우지 않아요. 미래의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아무 계획이 없어요. 순간순간 인생이 다른 걸 제안할 뿐이죠. 꿈이라기보다 욕망은 있는 것 같네요. 열정을 유지하는 거죠. 어린 소녀처럼 말이에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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